뿌리: A Plain Story
- 읽은지 한 달이 넘어가는 책(들)인데 이제서야 포스팅 중입니다. 아흑.


 

뿌리 - 상 - 10점
알렉스 헤일리 지음, 안정효 옮김/열린책들

뿌리 - 하 - 10점
알렉스 헤일리 지음, 안정효 옮김/열린책들


사전 정보를 거의 접하지 못하고 바로 파고 들어간 소설입니다. 겉표지만 보고 흑인 주인공이 자신의 혈통을 파헤쳐 내려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실은 주인공보단 내레이터라고 해야겠죠)는 줄거리 정도만 알 수 있었고, 예전에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종종 '쿤타 킨테'라는 이름을 언급하곤 한다는 걸 어렴풋이 기억해낸 정도였어요. 그리고는 책을 펴봤다가 엄청나게 얇은 종이 두께와 그 위에 오밀조밀하게 들어찬 빽빽한 활자에 경악했습니다...

...라고 쓰면 이 책을 읽을 계획인 분들은 지레 겁먹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부류의 책은 아닙니다. 사실 이 책은 어떤 분석이나 비평을 가하기 이전에 아주아주아주 재미있습니다. 저처럼 별 예습 없이 곧바로 책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시종일관 TV 대하연속극을 보는 기분이 들었을 겁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1970년대에 미국에서 드라마로 선보여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소설이랍니다. 문자매체이지만 영상매체에 용이하게 이식될 수 있는 장점을 타고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 같은 요즘 젊은 세대가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고요.

그렇다면 그 장점은 과연 무엇이냐? 700쪽을 가뿐히 넘기는 엄청난 분량을 자랑하지만 이 소설은 어디까지나 독자를 쉴새없이 쥐락펴락 하는 이야기로만 승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몇몇 드라마들을 두고 얘기하는 것처럼 전개가 빠른 것과는 좀 다릅니다. 작가는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을 뿐만 아니라 쓸데없이 길게 늘여 설명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알렉스 헤일리는 어디까지나 등장인물의 행동과 대화가 빚어내는 사건 자체를 보여주는 데에만 치중합니다. 시간을 몇 달 몇 년씩 건너뛰는 건 기본이고, 어디 한 장면에서 멈춰서서 센티멘털한 상태로 빠져드는 일도 없고, 사건에 대한 어떤 군더더기 해석이나 코멘트를 덧붙이는 일도 없습니다. 이것은 묘사를 배제한(혹은 교묘하게 숨겨버린) 단순한 스토리텔링 그 자체입니다. 번역을 맡은 안정효 역시 역자 후기에서 이런 수법이 마치 성서에서 예수의 족보를 나열하는 스타일과 비슷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수법이 독자들의 호응을 얻는 건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사건 자체가 아주 흥미진진하기 때문입니다. 수백년전 아프리카 세네갈 지역의 어느 한 부족 마을에서 태어난 쿤타 킨테의 혈통이 어떻게 20세기 미국의 알렉스 헤일리 자신에게 이르는지를 설명하는 과정 속에서 독자들은 그들의 인생에서 한 번 겪을까 말까한 생경스런 일들을 무더기로 조우하게 됩니다. 혹자들은 혹사당한 흑인 노예들의 잔혹사 정도만을 지레짐작하기 쉽지만, <뿌리>는 이외에도 신기한 구경거리들을 잔뜩 내장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아프리카에서 쿤타 킨테가 열일곱살까지 성장하는 과정을 다룬 대목이 그렇습니다.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는 종교적 의식이라던가, 소년 쿤타 킨테가 아버지와 함께 떠난 여행, 목동 생활, 성인식을 준비하는 쿤타 킨테 또래 남자아이들의 훈련 등등을 보세요. 자신의 (문화적) 뿌리를 궁금해하는 흑인 독자들을 의도적으로 겨냥하여 들어간 내용이겠지만, 다르게 보면 그 자체로 썩 괜찮은 인류학적 다큐멘터리가 됩니다.

게다가 알렉스 헤일리는 이런 사건들을 몇 개의 장 단위로 덩어리지게 뭉쳐 손쉽게 분절이 가능하도록 구성해 놓았습니다. 이렇게 하자 이들 사건은 단계별로 주인공이 극복해야 할 일종의 미션처럼 쿤타 킨테 앞에 하나씩 제시됩니다. 어떤 미션이 거의 해결 단계에 이르러 분위기가 상승한다 싶으면 소설은 어느새 또 다른 비극으로 덫을 파놓고 등장인물들에게 이것도 견뎌내 보라고 압박을 가하는 겁니다. 인생사 새옹지마!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예전에 썼던 <즐거운 인생> 포스팅을 참조하시길.) 혹자는 이를 두고 드라마 <대장금>이나 <허준>에서 선보였던 RPG 게임식 구성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발표된 시점이야 <뿌리>가 먼저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면 이 소설은 <대장금>의 흑인 버전으로 보일 지경입니다. 그 정도로 대중친화적이고, 또 쉽습니다.

방금 <대장금>을 언급했는데, <뿌리>를 이에 비교할 수 있는 건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스토리텔링 덕분만은 아닙니다. 작가가 등장시키고 있는 에피소드들은 성장, 여행, 사랑, 결혼과 육아 등등 인간사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말초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끌려온 흑인노예"의 백그라운드를 입히자 이들 사건은 평이한 일일극(Soap Opera)에서 스릴 넘치는 어드벤처로 돌변합니다. 쿤타 킨테와 그의 후손들은 이 소설 안에서 끊임없이 잡혀가고 팔려가고 헤어질 위기에 처합니다. 특히 어느 영화에서도 보지 못할 지옥경을 묘사하는 노예수송선 대목이나 쿤타 킨테가 탈출을 시도했다가 한 쪽 발 반쪽이 뎅겅 날라가는 씬은 거의 호러에 가깝습니다. 그만큼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이 그들을 매섭게 짓눌렀기 때문이라는 걸 재론할 필요는 없겠지요. 우리가 당연하게 주어지는 걸로 여기는 것들을 그들이 쟁취하는 것은 그리도 힘들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래도 쿤타 킨테의 후손들은 넘어져도 어떻게든 일어나고 또 어떻게든 그럭저럭 살아갑니다. 네. 장금이들이 떼로 등장한다니까요.

물론 수법이 어느 정도 읽히면 허(虛)와 실(實)이 보이기 시작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니 좀 뻔하게 보이는 구석이 있어요. 대표적으로 쿤타 킨테가 그렇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 투쟁하는 그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흑인들의 문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흥미로운 캐릭터이긴 합니다. 하지만 역으로 이 때문에 작가의 의도대로 끼워맞춰진 인공적이고 평면적인 느낌도 받게 됩니다. 나아가 책을 다 읽고 나면 지금까지 읽은 '역경에 좌절하지 않는 흑인들의 인간승리 이야기'가 우리가 보통 보는 웰메이드 드라마와 뭐가 다른가 싶은 생각도 들게 됩니다. '웰메이드'로 불리는 수작 정도는 되겠지만, 이를 '걸작'으로 만들어주는 이상의 무언가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언가'를 우리는 곧 발견하게 되는데, 그건 바로 역사 속에서 흑인 노예의 발목을 자르고 하는 이런 일들이 실제로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 소설의 에피소드들이 정말 무섭게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바꿔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단순한 스토리텔링이 독자들에게 설득력있게 먹혀드는 건 바로 이 소설이 가진 픽션/르포지타주 문학적 성격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생이 소설의 형식을 톱니바퀴 맞물리듯 단단히 규정하면서 조화를 이루고 들어간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알렉스 헤일리는 머리말에서 아프리카 현지 취재 과정에서 쿤타 킨테의 존재를 결정적으로 확인해 준 '그리오'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표하고 있는데, '그리오'란 부족 내에서 지식을 구전 형태로 전수받아 필요할 때마다 이를 암송해주는, 일종의 백과사전/도서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이들입니다. 이 소설의 기본적인 얼개는 이들 그리오에게서 출발하여 쿤타 킨테를 거쳐 알렉스 헤일리에게까지는 이어지는 구전 문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쿤타 킨테는 자신에게 주어진 '토비'라는 영어 이름을 거부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후손들에게 자신의 출생과 지난 이야기들을 구전시키도록 만들었습니다. 독자들의 정서적 카타르시스가 가장 절정에 달하는 부분도 마지막에 이르러 이 소설 역시 그러한 '구전'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이 폭로될 때입니다. 지식으로서의 역사를 전달함에 있어서 감상적인 장식은 필요없는 겁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를 통해 이 소박하고 꾸밈 없는 이야기(A Plain Story)는 한 가계의 뿌리를 밝히며 묵직한 감동을 전달하는 거대한 신화로 거듭납니다. 그저 주절주절 이야기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by lyh1999.
2009/05/10
by lyh1999 | 2009/05/10 12:15 | Journals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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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택씨 at 2009/05/11 11:13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힘있는 전달이 되었군요.
예전에 TV 방영할 때 아주 흥미롭게 봤던 기억만 나는군요.
Commented by lyh1999 at 2009/05/12 22:34
그러게요... 지금 드라마를 구해서 보기는 힘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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