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ark Knight: 배트맨/조커/투페이스... 따윈 될 수 없다
- 이 블로그는 2009년 2월 6일 10시 13분경 방문자 4만명을 돌파했습니다. 이글루스에 둥지를 튼 게 3,4년째 되는 것 같은데, 생각보다 너무 적죠? :-).......

- 새로 문을 연 CGV왕십리 아이맥스관에서 봤습니다. 거대한 스크린에 고담 시티의 오밀조밀한 빌딩숲이 꽉 들어차는 첫 씬에서부터 관객을 압도해 버립니다. 수도권에 사시는 분들 중 아직 아이맥스에서 보지 않았다면 이번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마시길.

- 영화에서 분장을 지운 히스 레저의 맨얼굴이 안 나왔다는 얘기가 대세인듯 합니다만... 한 장면에서 잠깐 나옵니다. :-) 하지만 뒷북일지도. -_-;;

- 놀랍게도 킬리언 머피의 허수아비가 다시 나왔습니다! 하지만 딱 한 시퀀스에서만 나왔죠? 아마 이번 영화에서 가장 낭비된 배역과 배우가 될 것 같습니다.

- 고담 시 병원을 폭파하는 장면은 병원이 아니라 폐건물이란 느낌이 너무 강하지 않았나요?




2008년 한 해 동안 외화 중에서 <다크 나이트>만큼 평론가와 일반 관객 모두에게 고루 폭넓은 비평적 관심을 받은 케이스가 또 있었을까. 시상식 시즌을 맞아 급기야 무려 재개봉(그것도 한국에서, 아이맥스 상영관에서!)의 축복까지 받아버린 지금 <다크 나이트>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얘기는 사실상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우리에겐 이미 <다크 나이트>의 핵심을 멋지게 꿰뚫은 평들도 있다(고담에선 모두가 정의를 원한다/허지웅, 백기사는 오지 않는다/허문영). 거의 모든 패가 공개된 지금 나는 어떤 대단한 무엇으로 그 논의를 와장창 뒤집으려는 의도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다. 이 글은 그저 어떤 보태기에 가깝다.

내가 인상적으로 보았던 장면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 조커가 상대방의 입속에 칼을 집어넣고 자기 입의 흉터에 대해 썰을 풀어놓는 장면 말이다. 이 장면은 영화에서 총 세 번 등장하는데, 그 때마다 조커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 흉터는 처음에 주정뱅이 아버지의 폭력에 의해 생긴 것이었지만, 다음번 그 주인공은 얼굴에 칼침 맞은 자기 아내로 바뀌고, 마지막 세 번째는 배트맨에 의해 중단된다. 이 불일치를 단순히 "혼란의 사도" 조커의 타고난 뻥차기 탓으로만 볼 것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나는 그 허풍들이 어떤 면에선 모두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첫 시퀀스에서 조커가 가면을 벗고 무심히 내뱉는 대사를 보시라. "사람은 자고로 죽을 고비를 넘기면 더 해괴해지는 법이야." 그리고 이 두 허풍은 모두 조커에게 닥친 어떤 트라우마, 즉 "죽을 고비"에 대한 기억을 드러내고 있다.

마스크를 벗은 조커의 첫 대사를 다시 보시라. 이는 이 영화를 움직이는 세 명의 축, 즉 배트맨과 조커, 투페이스의 캐릭터를 쌓는 가장 중요한 원리이기도 하다. 조커는 아마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어떤 끔찍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자기 뺨을 칼로 긋고 또 그었을 것이다. (이쯤 되면 그 자해가 진짜 물리적인 행위인지 상징적인 행위인지의 여부는 별로 상관없는 것이다.) 한편 배트맨이라고 해서 뭐 다를 게 있겠는가? <배트맨 비긴즈>를 보자. 이 영화는 상영시간 내내 배트맨의 정체성을 만든 가장 중요한 기원이 부모의 죽음, 우물 속 추락 같은 끔찍한 사건이라고 떠들어대는 작품이다. 그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브루스 웨인은 그 창창한 젊은 날을 여기저기 떠돌며 방황해야만 했다. 막판에 배트맨은 자신이 갖고 있던 박쥐에 대한 공포를 고담 시민 전체에게 전이시켜버리는데, 이를 통해 등장하는 영화 속 '공포'에 대한 논의는 곧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질문의 변형이기도 하다. 조커가 지껄이는 "넌 날 완성시켜주지(You complete me)" 따위의 낯뜨거운 애정고백은 장식적 대사로 집어치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두 캐릭터가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태어난 형제라는 점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팀 버튼의 배트맨 시리즈도 그랬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영화는 수퍼히어로와 사이코패스를 등가화하는 이 메커니즘을 유독 강조한다. <배트맨 비긴즈>를 통해 배트맨의 정체성이 트라우마의 산물임을 아는 관객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창조된 조커를 집어넣고 그것도 모자라서 똑같은 방식으로 투페이스가 탄생하는 과정까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조커는 자신이 품고 있는 혼란을 퍼뜨리기 위해 고담 시민들에게 지속적으로 굵직굵직한 끔직한 사건을 일으킨다. 이를 통해 시민들이 느낄 충격과 공포는 곧 트라우마의 주입과도 같다.

고로 <다크 나이트>에 등장하는 조커의 폭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나 자신에게 행해지는 폭력,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행해지는 폭력. 영화 초반에서 은행을 털거나 갱들을 구슬리는 장면까지만 해도 조커는 전자에 가까웠고 그 때까지는 평범한 조무래기 악당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가 정말 배트맨에 필적할 괴물이 되는 건 그 폭력이 점점 후자로 이동해 오면서부터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정점에 하비 덴트가 있다. 나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그냥 육체적 고통으로 끝날지도 모르지만, 나는 가만히 둔채 그 옆에 서 있는 가족이나 애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나에게 엄청난 정신적인 트라우마로 남는다. 투페이스의 절규를 보자. "사랑하는 사람에게 괜찮을 거라고 거짓말을 해!" 이것이 바로 조커가 하비 덴트에게 주입한 트라우마이자, 투페이스가 된 하비 덴트가 다시 고든에게 전이시키려고 하는 트라우마이다.

조커는 이 두 가지 폭력의 차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는 하비 덴트와 레이첼 도스 두 사람을 동시에 납치하고 둘 중 하나만 살아남도록 덫을 꾸민다.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폭력이 모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배트맨 비긴즈>에서 남주인공의 그저 그렇고 그런 여자친구 정도로만 보였던 레이첼은 문제의 납치 시퀀스를 통해 트라우마 생성을 위한 기막힌 인질로 탈바꿈된다. (여기서 대체 누가 매기 질렌홀을 비난한단 말인가?) 그러나 레이첼을 진짜 인질로 만드는 건 배트맨의 선택이다. 배트맨(혹은 고든)이 하비 덴트를 구출하지 않았다면 레이첼이 대신 괴물이 되었을 것이다. 악당으로 살아남거나 영웅으로 죽거나. 배트맨과 투페이스의 운명을 암시하는 하비 덴트의 대사는 조커에게 와서 이렇게 바뀐다. 트라우마로 고통받으며 살아남거나 공포에 질린 채 죽거나. 이것이 바로 조커가 말하는 혼란이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투페이스를 비롯한 고담 시티의 인간들이 이런 폭력 하에서 하나 둘 무너져가는 광경을 보게 된다. 그러나 투페이스는 어디까지나 그들을 대표하는 어떤 극단에 지나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너무 극적이고 신파적이어서 오히려 감정이입이 안 되는 측면이 있는 거다. 진짜 관객들을 절망하게 만드는 순간은 일반 관객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등장인물들의 마이너한 타락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하는 지점에서 찾아온다. 영화 속에서 고든의 가장 믿음직한 부하로 묘사된 라미레즈 형사가 레이첼을 납치한 사실이 반전으로 기능할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가족의 병원비가 산더미처럼 불어나고 악당들이 이를 인질삼아 마수를 뻗쳐오는 상황에서 당신은 라미레즈처럼 행동하지 않으리라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배트맨 비긴즈>에서 범죄도시 고담의 전제조건이 된 수없이 많은 부패경찰들이 이렇게 해서 생겨났으리라는 추측까지 덧붙여 둔다면 관객의 절망감은 배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조커의 '사회 실험(social experiment)' 실패를 <다크 나이트>가 제시하는 희망의 근거로 볼 수 있을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조커는 일반 시민과 죄수들이 나누어 탄 배에 폭탄을 설치해 놓고 인질극을 벌인다. 이는 언뜻 보면 레이첼 도스와 하비 덴트에게 했던 테러를 과격하게 확대시켜놓은 꼴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구석도 있다. 이 인질극은 그런 차이점들에서 결정적인 결함을 드러낸다. 첫 번째 문제는 이 인질극이 그들의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하비 덴트의 경우와 달리 조커는 배에 탄 사람들의 지인들이 아닌, 그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한다. 이는 가족이나 애인을 인질로 삼았을 때보다 훨씬 격이 떨어진다. 이건 앞서 분류한 조커의 두 가지 폭력 중에서 후자보단 전자에 가까운 것이다. 고담 시티의 사람들은 후자의 경우엔 강력한 공포를 느끼지만 전자의 경우엔 오히려 강력하게 저항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웨인이 주최한 모금회에 들이닥친 조커 일당을 마주친 한 노인의 대사를 보자. "우린 무뢰한 따위에게 겁먹지 않아!"

물론 그들은 스위치를 누르기 직전의 위기상황까지 다가간다. 폭파 찬성 369표 반대 140표. 그러나 더 결정적인 두 번째 결함이 존재하는데, 그건 폭탄의 작동 스위치를 시민들과 죄수들에게 쥐어줌으로써 그들을 폭력의 주체로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조커가 생산한 혼란의 '소비자'이지 조커와 같은 생산자는 될 수 없다. 그건 '일반 서민'이 죽어도 브루스 웨인/배트맨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조커와 배트맨을 소개하는 영화의 초반 시퀀스가 그들과 비슷한 이들을 하나 둘 제거하는 과정으로 이뤄져 있음을 상기해 보자. 조커는 자신과 똑같은 가면을 쓴 강도들을 제거하고, 배트맨은 자신을 흉내낸 자경단 일당을 허수아비와 함께 굴비엮어버린다. 이는 이 둘이 <다크 나이트>의 범인(凡人)들 가운데서 특출난/유일한(the one) 초인[영웅]임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장치이다.

하지만 불특정다수에게 폭탄 테러의 일부가 될 것을 주문하는 순간 조커는 은연중에 이 초반 시퀀스가 세운 규칙을 잊어버리고 있다. 기세좋게 스위치를 꺼내들었다가 다시 그만두고 풀이 죽는 사내의 경우처럼, 그들에겐 그런 초인급의 행위를 할만한 '오지랖'이 없다. 스위치를 던져버리는 흑인 죄수의 말처럼 "죽기는 싫으면서 죽일 용기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조커 대신 배트맨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당신은 일어나자마자 바로 바닥에 뛰어들어 푸시업을 하고(<배트맨 비긴즈>), 매일 미친 개[=조커?]들에게 물린 상처를 스스로 꿰매며, 투페이스의 악행을 자신의 것으로 뒤집어쓸 정도로 가혹하게 자신을 학대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당신에게는 투페이스 같은 강력한 트라우마조차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조커는 잠시 그들에게 그런 오지랖을 기대했던 것이 실수임을 깨닫는다. 누구나 영웅/초인이 될 수 없다는 수퍼히어로물 특유의 전제는 배트맨/조커가 이 시리즈에서 히어로로 존재하기 위한 가장 필수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하비 덴트 혹은 투페이스 같은 케이스가 수없이 튀어나오는 것이 배트맨과 조커 각자에게 이익이지만, 그들이 있는 한 그들에게 필적할만한 the one은 나올 수 없다는 것이 이 짝패의 딜레마인 셈이다. 그러나 배트맨은 이를 아직 인간에게 선한 면이 남아있다는 증거로 왜곡하거나 착각하고 있다. 고담 시티의 카오스는 아직 그대로인데 말이다. 조커가 배트맨의 말을 어설픈 정의감의 발로로 몰아붙이며 끝까지 조소로 반응할 수 있는 이유이다.

결론적으로 <다크 나이트>는 지독히 비관적인 텍스트이다. (이 영화가 논하는 정의는 아직 개인적인 차원에 묶여있는 면이 너무 커보인다.) 이 영화가 제시하는 세 가지 보기―배트맨, 조커, 투페이스―를 통해 우리는 '죽을 고비를 넘긴' 인간들이 트라우마에 고통받으며 어떻게 해괴해지는지를 보게 된다. 그리고 수퍼히어로물에 내장되어 있는 어떤 근본적인 한계 역시 보게 된다. 그 한계는 그들의 이야기를 외부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평범한 사람들을 철저히 절망하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다크 나이트>를 통해 우리가 어떤 윤리적인 판단을 내리게 된다면, 그건 바로 제목에 쓴 것처럼 "배트맨/조커/투페이스... 따윈 될 수 없다"는 선언이 될 것이다. 허나 여기서 "될 수 없다"는 표현에는 "can not"의 절망뿐만 아니라 "will not"의 확신에 찬 결의의 의미까지 함께 담고 있다. 어쩌면 "should not"의 조심스런 경고의 의미도 들어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논의는 라미레즈의 입장에서 다시 출발하는 것이다.




by lyh1999.
2009/02/06
by lyh1999 | 2009/02/06 01:38 | The Works | 트랙백 | 핑백(1)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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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택씨 at 2009/02/06 12:53
축하드려요!!!
음. 트라우마를 극복한 영웅과 악당이군요. (아니 아직도 극복은 못한 건가요?)
Commented by lyh1999 at 2009/02/06 18:37
네 저는 극복 못했다고 생각해요...
Commented by 잠본이 at 2009/02/08 14:30
탁월한 분석이십니다. 트라우마라는 측면과 영웅/범인의 차이를 생각해보니 또 이렇게도 해석이 가능하군요.
만약 다음편이 나온다면 이러한 딜레마에 배트맨과 고담시민들이 어떻게 대응하여 일어설 것인가 탐구하는 것도 의미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조커를 무시하고 넘어가기가 영 껄끄러운데 다시 내보낼 수도 없다는 거지만 OTL)
Commented by lyh1999 at 2009/02/11 16:50
조커야 뭐 다시 나오면 되죠... (말은 쉽구나 OTL) 히스 레저에게 명복을...
별개의 얘기지만... 다음편이 나온다면 그땐 정말로 계급 문제를 본격적으로 언급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다면 배트맨은 여전히 자기 정체성(부르주아 슈퍼맨-_-)의 진짜 문제를 억지로 외면하고 있다고 볼수밖에 없을 거예요.
Commented by 카스미 at 2009/04/08 10:45
조회수 4만 돌파 축하드려요.
배트맨은 안 봐서 뭐라고 이야기할 건 없네요;
단지, 글 중에서 고담시라고 하기에 대구시를 이야기하는 걸로 착각했더라죠.
Commented by lyh1999 at 2009/04/08 16:11
대구시를 고담이라고 하기도 하나요?? (이해 못하는 1인 OTL)
Commented by 카스미 at 2009/04/08 16:37
사건사고가 많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더라구요;
Commented by lyh1999 at 2009/04/09 15:40
그랬군요...;;; 배트맨은 나중에라도 한번 꼭 보시길 바래요. 처음엔 좀 밋밋할 수 있는데, 두번째 세번째 보면서 감상이 확 바뀐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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