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유혹: 카잔차키스, 성서를 다시 쓰다
- 교황청이 금서로 지정하고, 마틴 스코시지가 영화화하면서 다시 한번 논란이 됐던 작품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나서 이 작품을 같은 작가가 썼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 이후로 계속 읽으려고 별러만 왔는데 도서관에서 80년대 나온 케케묵은 고려원판만 발견할 수 있었어요. 그러더니 몇 달 뒤에 떡하니 전집이 나와버린 겁니다. 충격과 공포의 열린책들...

- 기독교 신자라면 한 번쯤 일독을 권하는 책입니다. 마틴 스코시지의 영화도 얼른 보고 싶습니다.

- 프로테스탄트 쪽에 신앙의 뿌리를 두고 있는 저는 평소 "성서"보단 "성경"이란 표현을 더 즐겨 쓰는데, 여기선 어쩐지 "성서"가 더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 처음 출간된 한국어판 제목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었는데 전집이 새로 나오면서 앞의 "그리스도"가 잘려나갔습니다. 처음엔 저는 그게 종교적 마찰을 우려한 발빼기라고 생각했는데 영문 제목이 "The Last Temptation"인 걸 보니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최후의 유혹 1 - 10점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열린책들

최후의 유혹 2 - 10점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열린책들


1.

기독교 신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사실 한 가지. 성서에서 나타나는 사건의 묘사란 지극히 건조하고 따분하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소설이 시간적 무대로 삼고 있는 신약의 4복음서가 특히 심한데, 그건 성서의 문체가 등장인물들의 정서보다는 사건을 기록하는데 더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경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역사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어서, 기자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적는 게 맞긴 합니다만 읽는 사람 입장에서 거기서 어떤 감흥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는 독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도록 만드는 조건이 되지만, 성서는 여전히 진리의 성역에 꿈쩍않고 갇혀있는 "경전"입니다. 예수와 야훼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사실"일 뿐이죠. 성서무오류설 같은 걸 끔찍이도 신봉하는 한국의 복음주의 신자들의 경우엔 더더욱 그럴 겁니다. 상당수의 신자들에겐 손발에 박히는 못의 고통을 막연히 상상하는 이상으로 성서의 문자와 행과 행 사이에 끼어드는 경우는 드뭅니다.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답니다...... 그래서 뭘 어쩌란 말입니까? 예수는 신이잖아요. 그 정도 일은 그냥 누워서 떡 먹기나 다름 없을텐데?― 이게 보통 신자들이 성서의 텍스트 바깥으로 안전하게 도피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 핸디캡은 이야기꾼들에게는 반대로 상상력을 발휘하기엔 더없이 좋은 조건이기도 합니다. 작가들은 여기에 어떤 설정을 덧붙이는 것만으로도 예수와 야훼 이야기에 익숙한 기독교 세계의 독자들의 정서를 손쉽게 쥐락펴락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예로 케빈 스미스 감독의 <도그마>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천사 메타트론이 하는 말을 봅시다. "열두 살짜리 남자애가 하나 있다고 쳐봐. 그 앤 어느 날 자기가 야훼의 아들이고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돼. 그 엄청난 충격을 받아들이려면... 10년 정도는 걸리겠지?" 간단한 유추지만 그 유추가 던지는 파문은 의외로 큽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예수의 입장에 감정을 이입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리고 이건 신의 영역에 갇혀 있던 예수를 신과 인간의 점이지대로 복원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이를 신성모독이라고도 부릅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는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은 성서가 가지고 있는 이 맹점을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파고든 작품입니다. (그린비 출판사의 인문서 시리즈 이름을 빌어) 성서의 리라이팅(re-writing)쯤에 해당하는 이 작품은 결과적으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성서에 무감한 독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가 왜 위대한 인물/신이라고 생각하는지 설명하는 논문과도 같아요. 하지만 <최후의 유혹>은 여전히 경전도, 역사서도, 논문도 아닌 소설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현대 독자들에게 성서의 텍스트가 단순한 문자 이하로 박제되어 버렸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박제화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저항이 소설의 유연한 드라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단순한 드라마타이징이 아니라 성서에 대한 "해석"을 필연적으로 전제로 하며, 동시에 성역으로서의 진리인 성서를 다양한 담론들이 난무하는 진실의 전쟁터로 끌어내리는 일이기도 하지요. 이건 분명히 위험한 작업입니다. 신성모독 논란과 금서 지정에서 이미 보았지만 이런 리라이팅이 다다를 수 있는 최악의 말로는 "위경"이라는 낙인이니까요.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작품은 이 "해석" 부분에서 가장 큰 정서적 울림을 전달합니다.


2.

결국 이 소설의 독서를 지배하는 가장 유해한 요소는 신성모독 논란입니다. <최후의 유혹>을 읽으면서 이런 "삐딱한" 부분을 마주칠 때마다 독자들은 종종 이 소설의 가치를 신성모독의 이름으로 깎아내리고 싶은 유혹에 처하게 됩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4복음서의 많은 부분이 종교적 영광을 위해 조작된 것이라고 판단하고(소설 가운데에선 천사들이 나타나 마태오에게 그가 듣고 본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을 받은 자신이 말하는 대로 복음서를 기록하라고 종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를 상당부분 이야기의 차원에서 "말이 되도록" 파편화하여 재배치하고 비틀어 버렸습니다. 창녀 막달라 마리아와의 연인 관계 설정 같은 건 너무 유명해서 말할 것도 없고요,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으면서 예수가 태어날 때부터 메시아로 안전하게 점지되었다는 기존의 인식도 버려야 합니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예수가 태어나면서 하나님의 어떤 계시를 받았다는 것만 알지 그가 메시아라는 확증은 결코 받은 적이 없습니다.) 메시아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에서 신으로.

"인간과 신 사이의 갈등"을 언급하고 있는 프롤로그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을 통해 예수는 인간에서 신에 이르는 고행의 길을 걷는 구도자로 그려집니다. 한편 로마 압제하의 이스라엘 민중들은 당대의 수많은 선지자/영웅들 중에서 누가 메시아인지를 놓고 아웅다웅하고 있고, 그들은 하나 둘 로마의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여담. 좀 무서운 얘기이긴 합니다만, 누군가가 옛 예언대로 메시아인지 아닌지 감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를 죽였다가 부활하는지 아닌지 지켜보는 게 아니겠습니까?) 독자들은 여기서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그(The One)'를 찾아 헤매는 모피어스와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매트릭스>의 '그'에게서 예수와 부처의 면모를 동시에 발견하는 해석을 아시는 분들이라면 이 작품의 예수 묘사가 어떤 면에선 고행을 통한 개인의 해탈을 강조하는 불교적인 색채가 상당히 강하다는 걸 눈치챌 수 있습니다.

열심당원 한 사람의 십자가 처형을 묘사하고 있는 서장은 소설에서 가장 임팩트가 큰 부분이기도 한데, 아직 메시아로서 각성하지 못한 목수 예수는 여기서 같은 민족이 매달릴 십자가를 만들고 있습니다. 카잔차키스는 이런 식으로 예수에게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고통들을 잔뜩 지워놓고 있습니다. 아버지 요셉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벼락을 맞아 중풍에 걸려 있고, 어릴 적 형성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성적) 애정은 번번이 발톱처럼 예수의 머리를 파고드는 야훼의 고통스런 징벌로 차단됩니다. 이 때문에 충격을 받은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로 전락하고(예수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모든 남자의 입술을 받는다 해도 무슨 소용!), 예수는 인류 전체는 고사하고 사랑하는 여인 하나 구원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 때문에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가 왜 아내와 자식이 딸린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하고 남들에게 미움받는 찌질이짓만 하는지 답답해 할뿐이죠. 십자가의 고통을 제하더라도 하나님의 아들로 운명지어진 자가 지상에서 살아간다는 건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인 겁니다. 예수가 인류 구원의 사명을 완수하는 과정도 이렇게 홍수처럼 쏟아지는 고통을 묵묵히 견디고 버티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고통은 예수의 일생을 통해 결코 극복되지 않으며, 어딜 가든 어떻게든 예수의 삶에 결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픈 걸 참을 수는 있어도 그 통증이 덜해지거나 사라지지는 않는 법입니다. 예수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십자가 처형이 당시로선 육체에 가할 수 있는 가장 극도의 고통을 의도한다는 걸 상기하시길.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이 소설은 정말 신성을 모독하고 있을까요? 저야 종교나 철학 전문가가 아니니 무 잘라먹듯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소설을 읽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할 수는 있죠.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카잔차키스는 예수의 인간으로서의 고통을 강박적으로 탁월하게 묘사했습니다. 다소 메저키스틱하긴 해도 우리는 예수의 인성에 어렵지 않게 몰입할 수 있고, 그의 감정을 쉬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신성은? 안타깝게도 예수의 신성이 부각되는 메시아 사역 부분은 인성이 부각되는 부분과 상당한 이질성을 드러냅니다. 예컨대 초반에서 자기 자신도 건사하지 못하던 예수와 중반으로 건너뛰면서 (그 중간의 공백엔 예수의 제자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폭풍처럼 등장하는 당당한 예수의 모습 사이엔 너무나도 괴리가 커요. 예정된 수순상 성서의 에피소드를 단순히 재연하는 수준에서 넘어가는 부분도 있어서 다소 늘어지는 느낌도 있습니다. 매섭게 세상의 종말을 부르짖던 세례 요한을 "잡아먹었다"는 해석이 부연되긴 합니다만, 자신감 넘치는 예수라니, 앞뒤가 안 맞고 어색하단 말입니다.

이게 이 소설의 단점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카잔차키스는 애당초 그런 부분엔 관심이 없었거나, 혹은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는 인간으로서 함부로 범접해서는 안될 신성은 그냥 불가해한 것으로 내버려 둡니다. 이 작품을 통해 예수의 심오한 신성의 원리를 꿰뚫어보고자 한다면 그 독자는 카잔차키스의 기준에선 그릇된 신앙을 가지고 있을 뿐더러(도스토예프스키는 <대심문관>에서 인간이 원하는 건 신이 아니라 기적이라고 꼬집습니다.), 그 의도는 철저히 실패할 것입니다. 성서와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수많은 기적들과 그 가운데 자리잡는 예수의 '신으로서의' 말과 행동을 우리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종교와 철학에 정통한 이들이라면 어떤 해석틀을 제시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면에서 카잔차키스는 예수의 신성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러한 신성 묘사를 통해 드러나는 효과입니다. 예수를 제멋대로 질질질 끌고다니는 야훼의 그 무시무시한 성질을 미리 제시한 덕분에 독자들은 예수의 사역 부분에서도 그가 여전히 야훼가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의 예수는 메시아로서의 활동을 시작하면서도 자신이 제대로 잘 하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유례없는 당당함은 끊임없이 그를 붙잡는 두려움과 불안, 유혹을 엄청난 정신력으로 은폐한 결과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그러나 다시, 예수는 그 통증을 참아내야만 합니다. 그는 자신의 다크 사이드를 아주 철저히 감추고 있고, 이를 독자만이 보는데서 슬쩍슬쩍 드러낼 뿐입니다.


3.

한편 이 작품을 통해 가장 이득을 본 인물은 막달라 마리아와 가리옷 유다(가룟 유다)입니다. 카잔차키스는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갖춘 예수의 반대 지점에 있는, 가장 인간다운 인간의 한 극을 만들어냈습니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관계는 한 평범한 남성과 여성의 (성적) 긴장감뿐만 아니라 신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사랑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한편 비열한 악당 정도로만 알려졌던 가리옷 유다는 과격 독립운동을 벌이는 열심당원으로 등장하여 나름의 논리와 명분을 갖춘 성숙한 캐릭터로 그려집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난도 불사한다는 그의 강고한 자세는 바로 눈 앞의 두려움에 벌벌 떠는 베드로 같은 다른 제자들과 비교되고, 어떤 면에서는 예수를 능가합니다. 그는 우리의 상상을 완전히 배반하고,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예수를 배반합니다! 게다가 예수가 문제의 '최후의 유혹'에 빠졌을 때 나타나 그의 태만을 가장 매섭게 질타("배신자!")하고, 예수의 각성에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걸 보세요. 예수가 불교의 부처를 닮았다면, 유다는 니체가 말하는 초인을 연상시킵니다. (불교와 니체 철학 모두 카잔차키스가 한때 깊숙히 빠졌던 분야입니다.)

이 작품에서 유다는 자신의 의지를 발휘함에 있어선 어떻게 보면 예수를 뛰어넘는 인물입니다. 배반자 유다를 주인공인 예수 수준으로 부각시켜 놓은 것은 완고한 신자들을 분노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만, 예수는 여전히 유다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습니다. 카잔차키스는 예수의 모호한 신성 중 단 두 가지만을 부각시켜 놓았습니다. 하나는 계급과 적대 관계를 뛰어넘는 사랑, 다른 하나는 육체의 고통을 뛰어넘는 영혼의 힘에 대한 믿음입니다. 열심당원 유다가 자신들을 식민지 지배하는 로마인들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며 영혼의 해방보다 육체의 자유가 더 시급하다고 주장할 때 예수는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그 반대를 고집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닌 모두를 위한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수의 모습은 마치 김현진이 지적하는 세일러문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 세일러 전사들은 자신들이 가진 엄청난 힘을 세계의 지배나 정복에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오로지 바보처럼 단순한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사용한다. 모든 싸움에서 언제나 그들이 중얼거리는 말은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지만 소녀들은 그 대상을 죽여서 이 세상에서 말살시키려 하지 않고 오직 빛으로 갱생시키려 한다. 물론 그 대상을 다른 사람으로 만들고 그 본질을 바꾸겠다는 생각 역시 어떤 의미에서의 폭력이지만, 오로지 소녀들의 중얼거리는 목적은 하나뿐이다. “어째서 모두가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는 거지?” " (참조: 소녀는 죽지 않는다 /김현진) 여기서 우리는 예수같은 평화주의자가 필연적으로 지상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고초에 더 한 발짝 다가가게 됩니다.

예수는 이 작품에서 "다 이룰" 때까지 끊임없이 고통과 대결하며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고, 이를 통해 카잔차키스는 자신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인간상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가장 좋은 부분은 그런 고통과 고통, 초극과 초극이 쌓여서 만들어 내는 정서적 효과입니다. 예수와 가리옷 유다가 보여주는 소위 '영혼의 자유를 향한 투쟁'은 결국 신성에 다다르기 위한 여정이고, 그 신성이란 영혼을 구속하는 육체의 한계를 초월해버리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아버지인 제베대오나 키레네 시몬 같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범인들과 우리 같은 독자들 모두가 그런 길을 추종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이런 인간상은 충분히 매력적이긴 하지만 이를 떠받치고 있는 체계는 어디까지나 소수 엘리트를 위한 철학이라는 인상이 강합니다.

여기서 예수가 처한 상황은 일본 애니메이션 <슬레이어즈> NEXT에서 피브리조의 흉계에 빠진 리나 인버스를 연상시키는 면이 많습니다. 세계의 창조주로부터 힘을 빌린 주술 기가 슬레이브를 쓸 수 있는 리나 인버스에게 피브리조는 세계의 멸망과 그의 연인(혹은 동반자) 가우리 중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고 묻고 리나 인버스는 결국 후자를 택하고, 그 대가로 자신의 몸을 창조주 로드 오브 나이트메어(Lord of Nightmare)에게 내어주고 맙니다. "최후의 유혹" 앞에서 리나 인버스가 택하는 선택은 그녀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증거입니다. 반면 예수는...... 여기서 우리 다수는 다시 소수를 위한 철학으로 어쩔 수 없이 다시 끌어당겨져 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작품이 가장 큰 감흥으로 다가올 때는 신이 될 수 없는 우리가 구도자가 아닌 범인의 입장에서 예수의 여정을 바라볼 때입니다. 한동안 자신을 떠나있던 애인이 영웅으로 돌아와 그의 발을 향유로 매만져줄 때, 동고동락한 스승이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걸 알리고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발걸음을 바라볼 때, 이 소설의 발걸음을 충실히 쫓아온 독자들 역시 제자들과 함께 부둥켜안고 심정적으로 같이 울지 않기란 힘듭니다. 그리고 그 울음은 그가 겪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충분히 체험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로선 범접할 수도 없는 가공할 고통을 버텨냈다는 것. 그리고 우리 역시 예수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 이를 확실히 한 것만으로도 카잔차키스판(版) 성서는 우리에게 충분한 위안을 줍니다.



by lyh1999.
2008/11/09
by lyh1999 | 2008/11/09 13:12 | Journals | 트랙백(1) | 핑백(1)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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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성경]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 속에 음..
지난 2007년 5월 18일자 헤럴드 경제 신문에서는 "성경을 18금서(禁書)로 지정하라!"는 홍콩 언론에 대한 요구를 골자로 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러한 요구는 성경 속에 담긴 음란함이 도를 넘었다는 이유에서 비롯됐습니다. 위의 신문기사가 발표된 이후로 수많은 안티 그리스도인들의 홈페이지에는 "기회는 이때다"하고 성경에 대한 '금서' 지정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의 글들이 많이 올라왔습니다. 심지어 성경에 나타나있는 '성적 표현'들을 구체적으로......more

Linked at All you need is .. at 2008/11/10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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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메이파즈 at 2008/11/09 21:13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실제로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가 너무도 인간적이란 사실을 느끼곤 합니다. '피할 수 없다면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말하거나 숨을 거둘 때에는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말하기도 했고요. '신이 아들'이라는 말보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많았던 것은 신의 아들로서 십자가고통을 감내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로서 감내하겠다는 의미가 컸겠지요. 석가모니는 태어나자마자 사방위를 걷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지만, 예수는 살해 당할지도 모를 어린 아이로 태어나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신성이라곤 밝게 빛나는 별 하나 뿐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가 위대한 것은 사명을 사람으로서 감당했기 때문이겠죠. ^^ 좋은 하루 되세요.
Commented by lyh1999 at 2008/11/11 07:12
그렇죠. 성경을 보면 예수가 인간이란 걸 명시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보통은 그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잘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Commented by 카스미 at 2008/11/10 14:51
잘 읽었습니다. ^^
Commented by lyh1999 at 2008/11/11 07:12
앗 정말 오랜만입니다. 조만간 수정하려고 했던 글인데 덜컥 링크까지 다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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