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모럴해저드에 저항하기
- 아시다시피 '모럴해저드(Moralhazard)'는 보통 경제용어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경제 분야에 한정하지 않고 그냥 '도덕적 해이'라는 표면적 의미로만 썼습니다. (혹 딴지 거는 분들이 있을까봐 -_-;;)

- 스포일러가 좀 있습니다만... 이번엔 그냥 내버려두겠습니다. 직접 소설을 읽으면 느낌이 또 다르니까요. :-)





눈먼 자들의 도시 - 8점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해냄

요즘 이 작품의 영화화 소식이 꽤 화제가 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책을 다 읽은 다음에 그 소식을 접했는데, 사실 저는 이 책이 영화보다는 오디오북에 더 걸맞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하나는 이 소설이 시각의 상실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눈을 감고 낭독으로 들으면서 전개되는 내용을 뇌리 속에서 그려보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만큼 주인공들의 재난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방법이 또 있겠습니까? 두 번째 이유는 이 소설이 묘사하는 지옥경이 너무나도 끔찍하다는 점입니다. 실명이 도시 전체로 퍼지면서 거리는 된통 아수라장이 되고, 길거리는 온갖 오물과 배설물 천지가 됩니다. 그리고 눈먼 자들이 그 지저분한 세계를 "보행"하는 거예요. 그들은 바닥의 질척거리는 오물을 맨발로 밟고 지나가면서도 또 몸속에서 새로운 오물을 꺼내 바닥에 보태기하는 겁니다. 이런 구역질나는 광경을 꼭 우리 눈으로 봐야겠어요? 공개된 몇몇 스틸 사진을 보니 그 정도로 혐오스런 수준의 묘사는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작가 주제 사마라구는 이 가공할 재난에 약간의 빈틈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여전히 독자의 시각에 의존하고 있는 문자 매체라는 점이 그렇고, 이 소설에서 대부분의 시점을 차지하는 주인공(안과 의사의 아내)이 모두가 눈이 먼 도시에서 유일하게 눈이 보이는 사람이라는 점이 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을 한 줄로 요약한다면 "모든 사람이 눈이 멀어버린다면?"이 아니라 "모두가 눈이 먼 도시에서 나 혼자만이 보인다면?"이 되어야 합니다. 독자들은 이 점을 혼동해선 안 됩니다.

독자들은 이 안과 의사의 아내의 눈을 통해서 이 소설의 내러티브/스토리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저는 이게 처음엔 좀 반칙이라고 생각했어요. 아까 전에도 오디오북 얘기를 했지만 저는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일종의 '실명 상실의 연습(역자 해설 제목)'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기대를 어느 정도 품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반드시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아요. '가장 두려운 건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국내 영화 포스터에 걸린 카피입니다. 많은 독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시각은 우리가 외부에서 받아들인 정보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지옥경을 "두 눈 뜨고" 바라보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또 있겠습니까?


하지만 더 괴로운 게 있는데 그건 바로 이 지옥경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앞에서 배설물로 뒤범벅이 된 길거리 얘길 했는데, 이 작품은 이런 방식으로 실명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 윤리의 어떤 추락을 폭로합니다. 수많은 비윤리적 행위들이 남들이 "보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공공연하게 전면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추락을 확실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독자들 역시 안과 의사의 아내처럼 눈을 뜨고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초기 실명자들이 정신병원에 수용된다는 줄거리는 굉장히 탁월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묘사 범위를 수용소로 국한시킨 것은 힘들여 도시 전체를 여기저기 비추지 않고서도 강간, 계급의 분리, 약자에 대한 폭력, 소수자 차별, 극한의 이기주의 등등의 문제를 인류 전체의 것으로 효과적으로 환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실명 사태로 촉발된 윤리의 문제를 개인의 것으로 축소키지 않고 그것이 사회/공동체, 혹은 시스템의 문제라는 사실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실명이란 설정이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주로 인간에게 시각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 얘기하도록 만드는 듯합니다만, 그 가운데 '이 지옥경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윤리적 질문은 상당부분 묻혀져 버리는 듯합니다. 안과 의사의 아내는 그러한 질문을 제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녀는 눈먼 사람들을 성심껏 도우면서 (다른 인물들에게 결여된) 배려와 이해의 덕목을 가장 성실히 실천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눈먼 사람들에 비해 윤리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여성들에게 성상납을 강요하는 폭력집단의 위협에 맞서 그녀는 그 우두머리를 살해(!)합니다. 사태의 외부에 놓인 독자의 입장에서 우리는 그녀의 선택을 쉽사리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건 잘 했다 못 했다가 아니라 이를 통해서 우리는 현실세계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윤리에 대한 보다 예민하고 사려깊은 감수성, 나아가 만연한 도덕적 해이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여전히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성찰에 방점을 찍는 작품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모든 소동이 가라앉은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도 실명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고 사람들은 그냥 하나 둘 눈을 뜹니다. 이를 통해 주제 사마라구는 가상의 설정을 통해 성취한 디스토피아의 공기를 그 설정이 사라진 후에도 그대로 이어갈 뿐더러, 소설 밖의 현실세계와도 그럴듯하게 연결하는데 성공합니다. 사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를 비롯해서) 현실 속에서 '윤리의 어떤 추락'을 실제로 목격한 독자라면 이 소설은 가상의 우화가 아니라 생생한 다큐멘터리로 다가올 것입니다. (나만 빼고) 모든 사람이 눈이 먼 것 같은 세계, 눈이 멀어서 자신의 다크 사이드를 어떻게든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세계... 굳이 2MB 월드를 들먹이지 않아도 그런 세계가 있긴 있다니까요, 정말로.

덧. 다소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우화적인 색채에 집착하는 것 같아요. 영화가 2008년 칸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되었다는데, 소설에서 우수수 쏟아지는 알레고리 에피소드들을 헐겁게 이어놓은 것 같다는 혹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저도 지금은 정확한 출처를 찾을 수 없으니 일단은 믿거나 말거나.) 그래도 한 가지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꼽자면... 실명 환자가 대량으로 발생하면서 수백 명의 환자들이 한꺼번에 수용소로 들이닥치는 장면을 들겠습니다. 모든 물자가 부족한 가운데 사람들이 먼저라도 침대며 식량이며를 차지하려고 난동을 부려요. 서로 발이 걸리고 넘어지고 난리가 나는 가운데 한켠 구석에서는 안대를 한 노인이 소동이 가라앉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윽고 상황이 종료되자 그 노인은 그 난동 가운데 비어있던 침대 하나를 힘들이지 않고 찾아냅니다. 진짜 생활의 지혜란 이런 게 아니겠어요?


by lyh1999.
2008/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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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h1999 | 2008/10/28 17:37 | Journals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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