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Beyond Lessons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열린책들


30대 중반의 한 그리스 지식인 주인공이 조르바란 이름의 65살 노인을 만나 크레타 섬으로 향한다. 주인공은 조르바가 머릿속에 박제된 지식과 생각이 아닌, 행동으로 깨달은 지혜를 보여준다며 그를 동경한다. 실제로 책을 읽다보면 베껴두고 싶은, 삶에 대한 진심어린 충고가 무더기로 쏟아진다. 하지만 무턱대고 죄다 밑줄을 그으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이거 함정이 아닐까. 주인공이 시도하는 소위 '먹물'들에 대한 비판도 결국엔 한계를 갖고 있다. 조르바에 대한 그런 열광도 온갖 철학, 형이상학, 사상을 섭렵한 주인공이나 작가 정도의 레벨이 되어야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게다가 지성과 교양을 갖춘 주인공은 조르바를 동경할 뿐 그처럼 살고 싶은 마음은 말 그대로 마음"만" 가지고 있다. 실천이 잘 안 되는 거다. 말이 좋아 열혈 육체파지, 물레를 돌리다가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손가락 하나를 쩍 동강내고, 다소 무책임해보일 정도로 섹스에 열광하고, 마음가는대로 떠돌아 다니며 사는, 그런 부류의 삶에 그가 뛰어들 수 있을까? 이는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나는 그런 생각은 추호도 가지고 있지 않다. 저건 너무 오바잖아......

불길한 예감은 으레 어긋나지 않는다. "조르바 같은 삶"을 시도했던 주인공의 시도는 과부의 죽음으로 좌절되었다. 결말에 다다르면 주인공은 역시나 조르바와 감성적인 교류 이상을 달성하지 못하고, 운명처럼 영영 헤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조르바와 함께했던 과거를 그리워한다. 웬만한 독자들 역시 주인공의 태도에서 더 나아가기는 힘들지 않겠나. (이런 줄거리 설정은 이런 비판에 대한 방어벽 차원인가 싶기도 하다.) 조르바는 실존인물이다. 하지만 작가가 증언하는 그의 언행이, 그리고 그 언행에서 인생의 교훈을 찾기를 촉구하는 태도가, 틈만 나면 부처를 언급하는 주인공의 형이상학 과잉의 교설과 얼마나 더 달라질 수 있을진 모르겠다. 내용물, 의미의 차원이 아닌, 실제 독자들의 마음을 울리는 영향력의 차원에서 말이다. 나아가 조르바에 대한 주인공의 열광이, 5집 앨범으로 "진짜 양아치 라이프"를 담아냈다며 DJ DOC를 호평하던 몇몇 평론가들을 떠오르게 한다는 것도 덧붙여둔다.

이 소설의 진짜 재미는 그런 교훈이 아닌 이야기나 구성 같은 소설을 엮어내는 재주에 있다고 해야 할듯 하다. 이 소설은 최근 읽어본 소설들 가운데서 정말 흥미진진한 사건들을 흥미진진하게 담고 있다. 물론 그런 느낌은 낯설기만한 근현대 그리스의 풍물을 간접 체험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점을 언급해 둬야한다. 그리스 하면 보통 케케묵은 고대 그리스 신화와 유적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소설은 그 이후로도 인간이 그 곳에서 여전히 일하고, 싸우고, 번식하며 살아왔음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터키와의 독립전쟁, 신화를 대체한 그리스 정교 등 역사적 배경을 촘촘하게 깔아둔 덕이다.

근현대 그리스 역사가 낯설게 다가온다면, 크레타 섬 사람들의 사는 모습은 여느 지역에 가도 만날 수 있을 듯한 보편적인 토속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익숙하게 다가온다. (교훈이나 내적 의미 등에만 주목한다면 이 소설은 홍상수 영화에 준하는 지루함으로만 기억됐을지도 모른다.) 그들에 대한 묘사를 통해 단순하고 선량하면서도 한편으론 잔인한 인간의 다중적인 면들을 적절히 안배하여 보여주는 것이 흥미롭다. 소싯적에 4개국 제독들의 무릎 위에서 칭애를 받았다는 늙은 여관 주인과 조르바의 로맨스, 온 마을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과부, 타락한 수도원 사람들의 에피소드 등이 펼쳐지는데, 속독을 하는 가운데서도 독자에게 이 복잡한 사건과 줄거리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의도하는 정서를 독자에게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 작품은 다른 작품과 달리 스스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잘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이 확연히 든다. 오랜만에 소설 읽는 재미를 되새김한 책이다.

인터넷을 대강 뒤져보니 조르바와 주인공이 해변에서 춤을 추는 대목이 명장면으로 잘 알려진 것 같은데, 아마 영화 때문에 그렇지 않나 싶다. 한편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던 장면은 여관 여주인의 죽음 대목이었다. 노인의 쇠약한 육체가 단순한 감기 하나에, 의사 한 사람 만나기 어려운 환경에 의해 그리도 쉽게 무너져간다. 죽고 싶지 않다며 절규하는 그녀의 육신은 이미 푸르게 부어가고, 옆에서 지켜보던 노파들은 세상만사가 다 그렇다는듯 너무나도 쉽게 그녀의 죽음을 재촉하며, 마을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예의 선량한 표정으로 그녀의 유품들을 강탈해간다. 포도주로 씻은 그녀의 시체엔 파리가 꼬여 날아와 "알을 슬어"놓는다. (시체를 포도주로 씻는 것이 단순한 장례 예법인줄 알았던 나는 이 부분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조르바가 그녀에게 키스하려다 (그 파리를 보고) 멈칫하는 순간, 나는 진정 시간의 무상함을 목격한 느낌에 휩싸였다.


by lyh1999.
2007/07/12
by lyh1999 | 2007/07/13 08:25 | The Works | 트랙백 | 핑백(1)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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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ed at Desperatelyh1999.. at 2008/11/09 13:12

... - 교황청은 금서로 지정하고, 마틴 스코시지가 영화화하면서 다시 한번 논란이 됐던 작품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나서 이 작품을 같은 작가가 썼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 이후로 계속 읽으려고 별러만 왔는데 도서관에서 80년대 나온 케케묵은 고려원판만 발견할 수 있었어 ... more

Commented by 세온 at 2007/07/27 15:57
안녕하세요 이오공감으로 건너왔다가 덧글 남깁니다. 그리스인조르바는 참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예요. 제가 소장하고있는 판본과 똑같은 책이 그림으로 보여서 괜시리 반가운 마음마저 듭니다. 과부의 죽음 장면은 확실히 굉장히 인상이 깊어요. 다들 어서 숨이 넘어가기만을 기다렸다가 강탈자라도 되듯이 너나할것없이 과부가 남겨둔 흔적들을 싹싹 쓸어 담아 가는 모습은 표독이랄지 혐오랄지를 다 넘어서서 삶의 단면을 담백하게 종이위에 그어놓은것 같습니다. 저는 마지막에 해변에서 저자와 조르바가 춤추는 장면이 백미라고도 생각해요. 영화는 못봤지만, 책이 넘어가는 내내 조르바의 우악스럽다고까지 할 생명력과 열정, 에너지를 동경하면서도 그와 정 반대인 자신의 길을 고집하던 작가가 마지막에 폭싹 다 망한다음에야 정말 말로만이 아닌 마음으로 조르바의 방식을 따라 처음엔 안추겠다 버티던 춤을 신명이 나서 춰대니까요. 왠지 카타르시스가 막 솟아납니다;
Commented by lyh1999 at 2007/07/27 16:15
세온/ 하하. 그렇죠... ^^;; 저도 요즘 들어 몸으로 살아있다는 걸 느끼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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