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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회에서 봤던 영화인데 이제서야 글을 쓰고 있습니다. 사실 글을 쓸지 말지 좀 망설였었거든요.
- 언제나 그렇듯이, 스포일러 있습니다. ![]() <연애의 목적>은 꽤 논쟁적인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그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영어교사 이유림(박해일)과 미술교생 최홍(강혜정)의 연애가 거의 성추행에 가깝기 때문이에요. 게다가 최홍은 이유림의 도발에 어이없이 넘어가는가하면, 절정 부분에서 이유림을 성추행 혐의로 고발해 버리고, 이유림은 교사 자격을 박탈당하는데다가, 막판에선 되레 최홍이 이유림에게 찝쩍대는 시추에이션이 연출되기에 이릅니다. 시사회장에선 이런 이유림의 행동거지를 보며 어이없다는 반응이 수십 번씩 터져 나왔고, 듀나는 이를 두고 직장내 성추행 예방 비디오로 쓰면 딱 좋겠다며 흥분했으며, 주변 지인 중에선 교사 사회 내에서의 성추행 실태가 실제로 얼마나 심각한지를 열심히 침 튀기며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기존 한국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선 상상도 못했던 노골적인 성적 코드가 박해일과 강혜정의 엽기발랄한 표정이 뒤집어씌워진 채 삽입되자, 유림과 홍의 연애는 그 정체가 굉장히 애매모호해졌고, 여기에서 영화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둘로 확연히 나뉘어버립니다. 관객들의 호불호는 이들의 연애가 정말 에로스의 수준을 넘어선 진지한 사랑이냐, 아니면 역겨운 남성의 역겨운 치근거림에 끝내 넘어가버리는 역겨운 여성의 역겨운 피해담이냐에서 엇갈리는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가 이 영화에 나오는 "연애"의 정치적 공정성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홍은 영화의 다른 등장인물들이 묘사하는 것처럼 남성중심적인 성문화의 피해자일수도 있고, 건방지게 꼬리나 치고 다니는 구미호일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유림 역시 철없는 성추행범이자 작가의 설명처럼 요새 보기 드문 순정파일 수도 있는 거고요. 그들의 연애가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는 <올드보이>의 대수와 미도의 사랑을 가지고 물고 늘어지는 것과 비슷하게 별 소득이 없는 일입니다. 이보다는 그 연애가 보여주는 메타포를 파헤치는 게 훨씬 더 재미있을뿐더러, 그러한 성찰 없이는 이 지루한 논쟁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사실은 사실이고, 인정할 건 인정합시다. 최홍과 이유림의 연애가 어떤 면에서는 명백한 성추행이라는 사실도요. 게다가 이 영화의 비유놀이는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연애는 "남자가 꼭꼭 닫힌 여자의 몸과 마음을 다짜고짜 열어젖힌다"는 구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태그라인이 분명해지자 최홍과 이유림의 캐릭터 역시 순식간에 구체적인 외양을 띠게 됩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철없는 남자는 겁도 없이 여자에게 덤벼들고, 여자는 겉으론 (당연히) 거부하면서도 속으론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 마냥 남자를 내려다보며 유유히 게임을 조종합니다. 여기까진 좋습니다. 로맨틱/스크루볼 코미디의 핵심은 이 두 남녀 주인공의 유연하면서도 팽팽한 줄다리기 심리전에 있고, <연애의 목적>은 이유림이 최홍에게 성적으로 접근하게 만듦으로써 그 미덕을 아주 강도 높게 지키고 있습니다. "젖었어요?" "나랑 하고 싶으면 50만원 줘요" 식의 치고 받기를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공간 중 하나인 학교에서 한다는 설정은 아시다시피 이전의 코미디 영화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센 편이잖아요. 그러나 이렇게 위험한 설정으로 장르적 세계 안에 안전하게 안주한다고 해도 가장 중대한 문제가 몇 가지 남습니다. "이유림은 왜 최홍에게 그런 식으로 찝쩍대는가?" 이건 성폭력/추행범을 적당히 미친 놈 취급하거나 "남자가 원래 그런 짐승이지" 식으로 받아들이는 관객들의 관습상 일단 넘어갈 수 있다고 쳐봅시다. 그러나 정말 문제는 최홍이에요. "스크루볼 코미디에서 남녀는 왜 사랑에 빠지는가"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게 되는데, 이는 바꿔 말하면 "피해자 최홍은 성추행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가해자 이유림에게 넘어가는가", 다시 말해 "최홍과 이유림의 '연애의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가 됩니다. 기존의 규칙을 비틀 의도가 없는 이상 최홍과 이유림은 일단은 반드시 연애에 성공해야 합니다.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연애의 목적>은 실패한 영화나 다름없어요. 그러나 이 영화가 논쟁적인 이유는 이러한 근거 대기에 실패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화는 이 부분에서 영악하게도 작가적 성찰을 개입시킴으로써 나름대로 논리적인 답변을 내놓고 있는데, 단 주목해야 할 점은 그 답변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장르적 규칙을 강화하기 위해 써먹은 무기인 "이유림의 성추행"이라는 겁니다. <올드 보이>에서처럼 말 한 마디, 인터넷의 댓글 한 줄로 진실(truth)이 규정되는 잔인한 현실의 모호함을 묘사한 건 오히려 저 답변을 뒷받침해주기 위해 설정한 배경설명에 가까워 보일 정도예요. 이 답변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최홍과 이유림 두 캐릭터를 잘 뜯어봐야 합니다. 최홍은 기본적으로 사랑, 더 나아가 인간관계 자체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인물입니다. 플라토닉한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갖고 있었지만, 마음 주고 정 주고 몸까지 주었던 사랑이 배신당하자 그리 된 것이죠. 그녀는 자기를 유부남 킬러로 매몰차게 몰아붙인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그래서 매일 밤을 불면증에 시달리고, 자기 세계를 꽁꽁 닫아두고 살아갑니다. 문이 닫히자, 그녀가 사랑을 하지 않게, 혹은 할 수 없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겠죠. 그녀의 세계는 마치 너무나도 단단한 알 같아서, 가족에 직장동료에 결혼 예정이라는 애인까지 아무도 감히 그 껍질을 깨고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무서운 설정이지만 "상처받은 외로운 여인" 캐릭터는 나름대로 요즘 현대 사회에서도 흔할 뿐더러 꽤 설득력도 있어요. (예전에 트리플크라운을 뜨겁게 달궜던 히키코모리 논쟁을 기억하시는지요?) 반면 이유림은 그 "껍질"을 깨기 위해 안티 최홍의 컨셉으로 설정된 캐릭터로 볼 수 있습니다. 마음보다는 몸으로 하는 연애를 신봉하며, 말 그대로 "어려서" 사랑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진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캐릭터예요. 최홍이 과거의 상처 때문에 단단한 껍질을 알 주위에 둘렀다면, 이유림은 상처받을 일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아직은) 단단한 알이 된 셈입니다. 최홍과 이유림은 이렇게 서로의 안티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래서 더더욱 서로 닮아있는 인물들입니다. 이유림이 최홍과 맺어질 수 있었던 건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아무도 최홍에게 접근하지도 접근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직 이유림, 피상적인 사회적 예절의 룰을 무시하고 무시무시하게 달려든 그만이 반창고를 억지로 떼어 숨겨진 흉터를 발견하듯 최홍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있었던 거예요. 성추행 혐의를 포함하여, 이유림의 모든 행동거지는 최홍의 "껍질"이 어떻게 "물리적으로" 깨져나가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좋은 기호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그 액션의 정점은 낯 뜨거운 대사의 난타전이나 노골적인 성관계 장면이 아닌 이유림이 최홍의 가택에 침입하는 장면이에요. 꼭꼭 잠겨있던 그녀의 집이 마치 미운 일곱 살짜리가 장난치듯 구는 이유림의 수작에 창문이 깨지고, 엿보임 당하고, 마침내 열려버리는 장면은 "5초만 XX 있을게요" 따위의 그 어떤 성적 코드보다도 폭력적으로 보입니다. 반면 그렇다고 이유림은 성할 수 있었던가요. 최홍의 그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반격이 부메랑처럼 되돌아 왔다는 건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요. 진심은 통하지 않으며, 꿈은 꺾이게 마련이고, 역사는 반복되며, 상대방을 상처 입히지 않고선 연애가 불가능할 때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최홍은 망설임 없이 이유림에게 주홍글씨의 낙인을 찍기에 이릅니다. 최홍과 이유림이 그렇게 해서 더욱 평등한 연애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분석은 이미 다른 리뷰들이 충분히 내놓은 바 있으니 여기에서까지 더 이상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다만 주목할 점은 최홍과 이유림 같은 캐릭터가 사랑하는 방법이 그렇게 서로의 이면을 발견하고 공유하는 데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이 영화의 성추행 논쟁으로 돌아와 봅시다. <연애의 목적>을 혹평하는 사람들의 주된 논조는 이 영화가 성추행을 옹호하는 혐의를 갖고 있다는 겁니다. 분명 이 영화는 한국 사회의 컨텍스트를 배경에 얽어놓고 겉으론 박해일의 순진한 얼굴을 하고 뺀질뺀질 거리는 일부 개념 없는 족속들의 존재를 제대로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비판은 아무래도 좋아요. 그러나 이는 그렇게 폭력적인 방법이라도 쓰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마음을 꼭꼭 닫아둔 최홍 같은 사람들이 주변에 떼로 널려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직장내 성추행 예방교육 비디오이자 동시에 연애 권장 영화로 읽힐 수 있다면, 그건 연애가 상대방의 껍질을 조금씩 깨고 들어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아주 당연한 진리를 설파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연애의 목적>은 요즘 잊혀져가고 있는 그 진리를 최홍과 이유림의 몸부림을 통해 아주 열렬하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하려거든, 상처받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요. Love is destructive, 사랑은 파괴적인 겁니다. 그러나 이유림의 그 철없는 치근거림과 최홍의 자조적인 불면증이 한층 심화될수록 영화는 그만큼 이 세계에서 사랑하기/사랑받기가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한숨섞어 토로하고 있다는 점 역시 놓쳐서는 안됩니다. <연애의 목적>은 그래서 사랑의 차원을 뛰어넘어 대인관계에 대한 처절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지독하게 자조적인 영화입니다. 나의 사랑은 얼마나 정직합니까. 나의 껍질은 얼마나 부숴져 있습니까. 이 의문을 제기한 것만으로도 이 영화의 역할은 이미 충분히 수행된 게 아닐까요? 첨언: "......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 from <데미안 Deutschstunde>, written by 헤르만 헤세, translated by 전영애 2005/07/11 by lyh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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