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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d of Evangelion OST: Nervous, Nervous, Nervous




최근에서야 안 사실인데, <에반게리온의 종말(The End of Evangelion)>이 개봉된 게 1997년이라는군요. 중학생 시절 학교 컴퓨터실에서 조악한 프로젝터 스크린으로 다 죽여버리겠다고 발악에 폭주를 해대는 아스카를 처음 접했던 게 1998년이었구요. 2000년이 되었지만 세컨드 임팩트는 일어나지 않았고, 결국 오타쿠는 구원받지 못했어요. 시간은 화살처럼 흘러갔고, 주제가 가사처럼 "소년은 신화가 되었습니다." 2005년 현재, 저는 종종 마치 1997년의 그 무시무시한 지옥경에서 살아남은 오타쿠들이 좀비마냥 거리를 어슬렁대는 광경을 보는 듯한 황홀경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갑자기 레이의 복제 더미들처럼 저를 향해 고개를 쳐들고 아스카의 대사를 뇌까리는 거예요. "...... 너하곤 죽어도 싫어."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그런 상상이 떠오를 때마다 이 앨범을 듣곤 해요. 일본 애니메이션 음악의 가장 커다란 축을 잡고 있는 No. 1이 <카우보이 비밥>의 칸노 요코라면, 한편 다른 축에는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담당한 사기스 시로가 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런 한낱 로봇 메카닉물에 온갖 웅장한 관현악과 "할렐루야" 성가 따위의 클래식이 당당히 비집고 들어온 것에 대해 경탄하던 일이 생각나요. 하지만 다른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즐겨쓰는 음악이 바로 이런 부류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그것 자체가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정말 놀라운 일은 그 음악이 이 영화와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는 점이었어요.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기본적으로 싸이코 드라마입니다. 사기스 시로는 말 그대로 뇌 속에 송곳을 찔러넣고 마구 휘젓는 듯한 이 예민한 영상에 롹킹한 밴드 위주의 사운드에서부터 앞서 언급한 할렐루야 성가를 지나 소울풀한 재즈의 감성까지 온갖 장르를 종횡무진하며 영화음악계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기기에 이릅니다.

그가 이럴 수 있었던 원동력은 첫째로 일본의 유명한 재즈밴드인 T-Square의 일원이었던 경력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재즈란 음악 자체가 온갖 잡동사니를 말 그대로 "Jam"해대는 성격이 강하잖아요. 하지만 그의 공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작품의 줄거리와 화면의 질감에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소리를 찾아서 부여해 주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자세히 들어보면 놀라운 많은 디테일을 찾아볼 수 있어요. 이 사운드트랙의 모든 곡들에는 여름이 1년 내내 계속되는 이상기후를 감안하여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에코 처리가 되어 있고, 전투 장면에선 비트와 혼(horn)이 전에 없이 웅장해지는가 하면 심리극 장면에선 스트링이 마구 무너지듯이 흐느낍니다. 결정적으로 오케스트레이션과 재즈 밴드를 중심으로 그 옆에 클래식과 락을 배치한 장르적 지형은 한낱 로봇물에 불과해 보일 수 있는 작품에 고급스러운 심오함을 포장하는데 기여합니다. 궁극적으로 이런 사기스 시로의 편곡은 온갖 딱딱한 금속과 부글대고 흐물대는 화학물질과 신경물질들이 넘실대는 (급기야는 인간의 몸 자체가 터져나가기까지 합니다!) 에반게리온 메카닉에 아주 적절히 맞아떨어졌어요.

물론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사기스 시로의 음악이 칸노 요코의 그것처럼 환장할 정도로 매력적인 건 아닙니다. <카우보이 비밥>에서 칸노 요코의 음악이 영상에서 떼어놓은 후에도 그 나름대로의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했다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음악은 어느 정도 영상에 의지할 때여야만 가치를 발휘하는 면이 있어요. 하지만 문제적 애니메이션의 최종편이었던 <에반게리온의 종말>에서 사기스 시로의 음악적 재능도 극에 달하고 있고, 그와 함께 발매된 사운드트랙 앨범 역시 영화와는 별개로 나름대로의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첫번째로 이전에 TV애니메이션에서 지극히 파편적인 일부만 드러났던 테마들이 이 영화판에 와서 하나의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거예요. 슬픈 멜로디로 유명한 Thanatos는 공황 상태에 빠진 신지를 다그치는 미사토의 장면에서 "The Intrusion of the Vicarious Substitute"의 단촐한 기타 중심의 편곡으로 다시 등장하더니 1부 엔딩 크레딧에서 가사를 붙여 재지하게 편곡한 소울곡 "THANATOS - if i can't be yours"에서 스산한 매력을 발산하며 이후 이어질 "죽음의 제의"를 예고합니다. Rei의 테마는 "Emergency Evacuation to Regression"의 원시적 합창, "The Enlargement of the Blockade"의 웅장한 편곡으로 부활하여 청자의 영혼을 처연한 불안으로 스멀스멀 잠식해 들어갑니다.

이 극장판을 위해 새로이 작곡된 트랙들 역시 엄청납니다. 에반게리온 초호기와 함께 인류보완계획의 제물로 꼼짝없이 걸려든 신지의 자아를 폭주시키는 "Honeymoon with Uneasiness" 같은 트랙들은 말 그대로 신경을 마구 긁어대고, 18번째 사도 인간의 NERV 침입 장면에서 삽입된 "Performance's End in Midsummer"은 이전에 등장했던 전투 장면 배경음악의 질을 간단히 뛰어넘습니다. 남녀 혼성 합창의 강렬한 고음 처리로 아스카의 부활을 알리는 "It's False, the Rebirth"나 에바 2호기의 전투 장면에서 등장하는 "II Air (Orchestral suite No.3 in D Major, BWV. 1068)" 같은 트랙들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언급하는 게 귀찮을 정도예요. 특히 3분 30초 제한이 걸려있는 내부전원만으로 에바 양산기 9대를 모두 쓰러뜨려야 하는 아스카의 처절한 전투장면에서 "II Air"의 성스럽고 서정적인 멜로디는 역설적으로 그 감정을 극한으로 끌어올립니다. 더구나 이 클래식은 이 장면과 결합하면서 슬프고 처연한 아우라까지 새로이 얻었고, 현대의 대중들 사이에서 고전의 끈질긴 생명력을 다시금 확연히 증명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 앨범의 백미는 모든 인간들의 몸이 태초의 원시 바다의 액체 형태로 화(和)해 버리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Komm, Susser Tod"와 그 후 신지의 사색 장면에 삽입된 클래식 트랙 "Jesus bleibet meine Freude [Herz und Mund und Tat und Leben BWV.147]"라고 볼 수 있습니다. <레이더스(Raiders)>에서 나치 독일군이 몰살당하는 씬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온 인류가 (신체상의) 죽음을 맞는 무시무시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삽입된 음악은 짖궃게도 앞서 언급한 "II Air"처럼 서정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이 결합된 슬픈 기타 팝입니다. 게다가 이 노래는 "I will never love again", "My world is ending", "I can't forget the past", "It's killing me inside", "It all returns to nothing", "I'm just letting me down" 따위의 다크 포스를 잔뜩 머금은 가사(이 가사는 감독 안노 히데야키가 직접 쓴 것입니다.)를 흑인음악(가스펠 성가)의 문법까지 차용하며 절대 웃지만도 울지만도 않는 아리안느(Arianne)의 무덤덤한 보컬, 축제라도 온 마냥 한껏 들뜬 합창 코러스, 비틀즈의 "Hey Jude"를 연상시키는 후렴 멜로디, 그리고 노트(note)의 최저와 최고 지점을 미친듯이 종횡무진하는 현악 편곡을 통해 표현해 냅니다. 7분여에 가까운 대곡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도 않아요. 가히 "모순덩어리 미학"의 극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 직후 바로 등장하는 "Jesus bleibet meine Freude"는 이 광란에 가까운 의식을 잠재우고 청자를 신지와 함께 무한한 반성과 우울한 성찰의 길로 인도합니다.

영화의 진행 순서대로 올곧이 배열되어 상승과 하강, 극과 극을 오고가는 이 트랙 구성을 보면서 우리는 이 앨범에 과거 여느 고전 교향곡들이 그랬던 것처럼 "영혼을 잠식하는 정체불명의 불안과 그 불안에 맞서 싸우는 자아의 처절한 전투적 심리극"이라는 테마를 부여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워낙 영화 자체가 문제작이자 명작이었고,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세기말의 아이콘 딱지를 붙여줄 수 있을 정도로 명장면 일색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우리는 굳이 이카리 신지의 인류보완 과정을 따라가지 않아도 이 앨범을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 영혼의 불안함과 처연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보았던 리뷰에서처럼, 우리 현대인의 모습에는 신지, 레이, 아스카를 비롯한 <에반게리온> 등장인물의 모습이 한데 뒤섞여 있어요. 그 이유가 왜인지, 이 앨범을 들으면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앨범은 영화와 떼어놓은 후에도 폐인이 된 아스카의 목을 조르며 "불안한(nervous) 나를 제발 구해줘"라고 비명을 지르며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고, 지금에 와서도 사운드트랙의 명반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이에요. 당신 안의 에바를 어떻게 보완할 지는 이 앨범을 듣고, 스스로 정하시기 바랍니다. 인류보완계획은 아직 애니메이션의 환상 속에서만 맴돌뿐, 여전히 완성되지 않았어요.



[Track List]

01 他人の于涉 (Outsider Interference)
02 眞夏の終演 (Performance's End in Midsummer)
03 退行への緊急避難 (Emergency Evacuation to Regression)
04 僞りの,再生 (It's False, the Rebirth)
05 身代わりの侵入 (The Intrusion of the Vicarious Substitute)
06 II Air (Orchestral suite No.3 in D Major, BWV. 1068)
07 空しき流れ (The Flow of Void/Futility)
08 THANATOS -IF I CAN'T BE YOURS
09 始まりへの逃避 (Escape to the Beginning)
10 不安との密月 (Honeymoon with Uneasiness)
11 Komm susser Tod
12 Jesus bleibet meine Freude [Herz und Mund und Tat und Leben BWV.147]
13 閉塞の擴大 (The Enlargement of the Blockade)
14 夢のスキマ (The Schema of Dream)

(괄호 안 영문 트랙 제목은 번역된 것이며 공식 명칭은 아닙니다.)

by lyh1999 | 2005/05/20 12:21 | The Works | 트랙백(1) | 핑백(1)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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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FReEstY - 시간.. at 2005/05/24 00:16

제목 : 오늘의 스크랩.
lyh1999와 혼자놀기 - The End of Evangelion OST: Nervous, Nervous, Nervous - 에반게리온을 몇번이고 돌려 보면서 가끔 사기 당한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 이 작품의 진정한 재미일런지도 모르지요.) 한국의 수많은 애니 팬(과연 팬이라고 부르는게 적당한지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많긴 합니다만) 중에서 특히 저처럼 90년대 후반 부터 애니메이션에 빠져든 사람들은 이 작품으로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처음 접한 사람이 많으리라고 봅......more

Linked at All you need is .. at 2007/09/11 01:15

... 연애의 목적: Love is destructive. [lyh1999님] (7월 11일) 드라이 아이스 [키치소년님] (6월 23일) The End of Evangelion OST: Nervous, ... [lyh1999님] (5월 24일) 정치적으로 바른 흥부와 놀부 [Tanzwut님] 2. 방명록에 쓰신 덧글에만 답글을 달겠습니다 ... more

Commented by 프리스티 at 2005/05/20 23:52
타나토스..-_ㅠ
Commented by lyh1999 at 2005/05/21 01:48
후후.. 타나토스 가사 번역을 보고 소스라치게 뒤집어졌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Commented by 사츄 at 2005/05/22 11:10
아아, 영어실력이 미천하던 시절, 달콤한 죽음을 음이 좋아서 듣고 다니다가 미국에서 살다 온 애한테 들려줬더니 애가 그때부터 절 이상한 놈 취급했던 기억이 납니다^^;
Commented by 요아킴 at 2005/05/23 16:44
저도 한번 들어봐야겠습니다 :)
Commented by 카스미 at 2005/05/24 00:02
오오, 멋진 글 감사합니다. 제 페이지에 추천글로 올려놓도록 하겠습니다. ^.^
Commented by 카스미 at 2005/05/24 00:07
덧. 본문중의 "I will love never again"은 가사가 미묘하게 다르네요. "I will never love again"이 맞습니다. ^.^;
Commented by lyh1999 at 2005/05/24 00:23
카스미/ 수정했습니다. 지적 감사해요.
Commented by floodi at 2008/07/27 23:44
간만에 앨범 듣다가 구글 검색으로 들어왔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주소만 링크하겠습니다. :)
Commented by lyh1999 at 2008/07/30 22:33
저도 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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