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중사 케로로: 마주보기, 내려다보기
- 원제는 모두가 알다시피 <케로로 중사>이지만, 저는 한국판 제목 <개구리 중사 케로로>가 더 맘에 듭니다. <강철의 연금술사>도 51화를 몰아서 보느라 죽을 맛이었는데, 이번엔 90화를 훌쩍 넘어가네요. -_-

- 지난 번에 이어 또 <걸리버 여행기> 얘기가 나옵니다. 쉴새없이 변형되는 내러티브를 또다른 영문학의 고전인 <트리스트람 섄디>와 비교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지만 그건 제 능력 밖의 일이 될듯 합니다.




1.

<개구리 중사 케로로>를 평가하면서 가장 먼저 맞딱뜨리는 장애물은 만화영화는 유치하고 유아틱하다는 세간의 인식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케로로의 매니악한 팬일지라도) 이 작품을 온당하게 바라보려면 이런 인식을 어느 정도 수긍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매회 어김없이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일본의 명절이나 풍속에 대한 소개, 숙제는 밀리지 말고 미리미리 끝내놓으라는 식의 공익광고스러운 메시지를 보고 있자면 아마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이쯤되면 케로로 소대의 그림자가 알고보니 텔레토비더라 식의 농담도 급조해낼 수 있을 겁니다.

썰렁한 농담이지만, 케로로 소대는 어떤 면에서 정말로 텔레토비와 유사합니다. 이 두 프로그램은 훈육의 대상으로서의 아동을 외계인으로 비유합니다. 물론 우리가 만화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인생을 다시 한번" 총을 맞을 수는 없는 일이니, 실제 유아나 아동에게 외계인을 그들과 동일시하는 설정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논하기 어렵겠죠. 다만 (이미 커버린) 어른들에게 이 설정은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무엇보다 "외계인:지구인 = 아동:성인"의 등식까지 성립하게 되니 아동을 어른에게 종속되지 않은 대등한 존재로 놓고 봐야 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압박해 오지요. 어른들[지구인]의 눈에는 이해불가이지만, 아이들[외계인]은 그들 나름대로의 커뮤니케이션과 코드, 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걸 '문화상대주의', '정치적 공정성'이라고 하던가요?

그러나 공통점은 여기까지입니다. 태산만한 탈을 쓴 텔레토비가 자신을 아동과 등치시키는 방식은 머나먼 외계 혹성에서 아기처럼 온갖 귀염과 아양과 애교를 떠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케론 별의 개구리 외계인들은 직접 지구 땅위로 강림하고 "침략"하여 지구인과 대면합니다. "아저씨"로 불릴 정도로 다 자란 어른 외계인이 지구에서는 초등학생이나 유치원생만한 덩치밖에 안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내려는 의도이죠. 엄마'님'의 어머니인 할머니를 "제독"으로 부르는 케로로 소대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은 그들 나름대로는 정말 진지하지만, 지구인 시청자들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정말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 (무궁무진한 "상상력"으로 가득찬 케로로 소대의 침략작전이란 게 얼마나 황당무계함 일색인지 상기해 보시길.) 이 순간 외계인의 비유 설정은 다분히 차별적이고 편협한 '크기의 정치학'으로 돌변합니다. 큰 것은 성숙하고 위대하며, 작은 것은 어리숙하고 보잘 것 없다는 거죠. 앞에서 얘기했던 "대등함"의 코드가 함의하는 정치적 공정성과는 무척 대조적이지요.

(지난 <왕의 남자> 글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눈치채셨을지도 모릅니다만,) <개구리 중사 케로로>는 그래서 다분히 고전 <걸리버 여행기>의 변형 텍스트로 보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 걸리버는 1부와 2부에서 소인국과 거인국에 표류하면서 두 나라의 문화에 대해 배우게 되는데요, 소인국의 제도와 문화, 그리고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거인 걸리버에겐 하찮고 우습게 보이고, 반대로 거인국 사람들에게 걸리버의 모국은 조롱의 대상이 됩니다.

이는 케로로 소대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케로로가 그 나름대로 완결하고 존중받을 존재일지라도, 자기보다 거대한 생명체들이 마구 지나다니는 이 위험하고 낯선 지구 위에서 그들은 나츠미의 고정멘트대로 "바보 개구리"에 지나지 않지요. 케로볼을 빼앗긴 케로로 어린이에게는 끊임없이 지구 위의 "생포, 세뇌, 해부"의 위협과 "바보"라는 구박이 가해집니다. 바보가 되고 싶지 않으면 지구 어른들처럼 생각하고 사는 법을 배우라는 거죠. 이것이 <개구리 중사 케로로>가 드러내는, 우리가 소위 말하는 "사회화"와 "교육"의 실체입니다. 여기엔 아동을 평등하게 대하면서도 그들을 마주볼 수 없는, "위에서" 내려다봐야 하는 불평등한 시선이 모순적으로 동시에 작용합니다. 덤으로, 후유키의 서랍 속에 고이 숨겨져 웬만해선 등장하지도 않는 케로볼이 무얼 상징하지는 읽는 분들의 상상에 맡겨두겠습니다.


2.

거인국에서 자기 몸뚱아리만한 파리와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여야 했던 걸리버처럼, 케로로 소대의 입장에서 지구생활은 어떤 면에선 무척 끔찍한 호러물이나 다름없을 겁니다. 하지만 <개구리 중사 케로로>가 이런 불쾌한 억압의 이면을 대놓고 드러내진 않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어둡거나 우울한 작품도 아니고요. 이건 케론 별 외계인뿐만이 아닌 그들을 마주친 지구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애니메이션이 노리는 진짜 재미는 지구인의 입장에서 케로로 소대에게 앞에서 말했던 "마주보면서" "내려다보는" 이중적인 시각을 적용할 때 나옵니다.

후자의 "내려다보는" 시각에서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건, 사방팔방 망아지처럼 날뛰는 아이들을 외계인으로 비유한 것은 요즘 세태에 잘 들어맞는다는 것입니다. 케론 별 외계인들이 지구인과 함께 생활하게 되자, 이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영악한 애어른의 은유로 기능하게 됩니다. 케로로의 방에 널려져 있는 온갖 첨단기기를 상기해 보시길. TV와 인터넷 등의 대중문화에 일찍 길들여져 사고방식이나 행동은 이미 어른들의 그것에 다름없죠. 그들은 속마음에 순정을 숨긴 마초[기로로]이자, 변태/기크(geek)/너드(nerd)[쿠루루]이고,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이중인격의 게이[타마마](!)이며 이지메의 트라우마를 숨긴 프로페셔널 군인[도로로]입니다.

스스로 다 컸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처음에 지구인들에게 취하는 태도는 잔뜩 기고만장해서 그들을 우습게 보는 거였죠. "지구 최강의 병기" 나츠미 양에게 항상 된통 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작전을 짜고, 알 수 없는 말로 서로 낄낄대며(그 개구리들끼리의 "공명"을 상기해보시길), 기어들려고 계속 용을 씁니다. 마치 학교 선생님에게 잔뜩 혼나고 뒤돌아서서 "불쌍해서 한번 봐준다"고 툴툴대는 초등학생들을 보는 것 같지 않나요. 한국 시청자들이 그들을 보면서 온라인/오프라인을 휩쓸고 다니는 버릇없는 초딩들을 떠올리지 않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지간히도 말 안 듣는 청개구리의 신화를 떠올리는 건 덤이고요. 실제로 부모들이 그 귀여운 얼굴로 끊임없이 집을 어지르고 망가뜨리는 자녀들을 보면서 "얘네들은 대체 어디 행성에서 지구의 이 집안을 침략하려고 굴러들어온 외계인일까" 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닐 거예요. 그런 면에서 케로로 소대는 분명 짱구와 미달이의 현재적 변용입니다.

그러나 이 악동적 요소로 똘똘 뭉친 케로로는 시선을 낮춰 "마주보기" 시작하면 그냥 내버릴 수 없이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이 애니메이션에 등장하고 케로로 소대를 상대하는 지구인 주인공이 중학생 청소년이라는 점입니다. 청소년은 기본적으로 아동-성인의 이분법을 무효화시키는 중간자적 존재이자, 그러면서도 어른이 되어가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개구리 중사 케로로>가 바라보는 청소년은 부모[어른]를 상실한 존재입니다. 히나타 남매의 만화잡지 편집장 어머니와 모모카의 거대재벌 총수 아버지는 일 때문에 거의 등장하지도 않으며, 사부로와 코유키의 부모는 아예 설정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이 작품은 집과 학교(학원)에 갇혀 혼자 자라야 하는 청소년의 현실을 부각시킵니다.

케로로 소대가 하루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초딩이고, 엄마님 히나타 아키가 재미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달려드는 키덜트(kidult)라면, 이들 청소년에게는 성장과 퇴행의 욕망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이런 혼자 남겨진 아이들을 위해 케로로 소대는 정말 멋진 인생의 파트너라고 할 수밖에 없죠.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케로로 소대는 아이들에게 단순한 외로움 해소용 장난감이 아닙니다. "내려다보기"와 "마주보기"가 동시에 가능한 대상이라는 점에서 중요해요. 아이들은 케로로 소대를 마주보면서 전혀 다른 세계[외계]와 소통하고 이해하는 법을 배워나가며, 대등한 친구로서의 우정을 쌓아나갑니다. 동시에 어른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이들은 케로로 소대를 내려다보면서 그들의 형과 누나, 더 나아가 보호자 역할까지 해내야 합니다. 전자가 대책없이 케로로에게 "친구", "우정" 따위 단어를 남발하는 후유키의 차지라면, 후자는 집안에서 어르신 역할을 자임하며 저도 모르게 케로로가 저지르는 온갖 장난의 뒤치닥꺼리를 해치워야 하는 나츠미의 차지인 셈입니다. (정말 나츠미는 어떤 면에선 제 엄마보다도 어른 같잖아요.)

이전에 나온 씨네21의 기사에서 <개구리 중사 케로로>가 과거의 <도라에몽>이나 <모래요정 바람돌이> 같은 과거 작품의 미덕을 이어받았음이 살짝 암시되기도 했습니다만,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 작품이 설정하는 케로로 소대와 지구 아이들의 동반자 관계(companionship)는 좀더 복합적입니다. 이들은 케론성의 막강한 과학과 니시자와 그룹의 화가 날 정도로 엄청난 재력으로 지구 아이들을 온갖 엽기적인 아동의 상상력의 세계 속에 온전히 붙잡아 둡니다(아 글쎄, 시리즈가 시작된지 2년이 다 되어가는데 나츠미는 여전히 중학생이잖아요!).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조금씩 조금씩 어른의 세계로 떠나보내고 있지요. 비단 청소년 뿐만 아니라 성장과 퇴행의 정서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엽기 외계인 시트콤을 즐길 수 있을 겁니다. 엔딩 크레딧 노래의 가사처럼, 이 별 위에서 그런 친구 만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만화영화는 유치하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유치하지 않기도 합니다.



2006/01/17
by lyh1999.
 
by lyh1999 | 2006/01/17 18:41 | The Works | 트랙백 | 덧글(2)
트랙백 주소 : http://lyh1999.egloos.com/tb/1251262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oldman at 2006/01/17 19:17
좋은 글 정말 잘 봤습니다.
같은 작품을 보고도 이렇게 생각이 다른 글들을 보면 정말 기분이 좋아집니다.
링크도 같이 신고하겠습니다 ~
Commented by lyh1999 at 2006/01/18 20:48
oldman/ 고맙습니다.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Passion is just for fun.
by lyh1999
Calendar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다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오래도록 고독하게 남아서 깨어나,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quoted from 라이너 M. 릴케 "가을날"
카테고리
전체
"Quotes"
The Works
The SKT
From the Others
Journals
Translation
방명록
미분류
태그
센스앤센서빌리티 joss 브로크백마운틴 헐크 내이글루결산 colourmefree stone 에반게리온신극장판파 결혼피로연 안노히데아키 bandofdynamicbrothers 에반게리온 라이드위드데블 anglee 이안 조스스톤 에반게리온신극장판 jossstone 색계 다이나믹듀오 88만원세대 에반게리온-破- 와호장룡 음식남녀 에반게리온-파- dynamicduo 리안 아이스스톰 evangelion 사기스시로
전체보기
라이프로그
생태페다고지
생태페다고지

생태요괴전
생태요괴전

무례한 복음
무례한 복음

뉴라이트 사용후기
뉴라이트 사용후기

윤하 3집 - Growing Season [Part B]
윤하 3집 - Growing Season [Part B]

신세기 에반게리온: 파(破) O.S.T [2CD 스페셜 에디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파(破) O.S.T [2CD 스페셜 에디션]

Michael Buble - Crazy Love
Michael Buble - Crazy Love

다이나믹 듀오 5집 - Band Of Dynamic Brothers
다이나믹 듀오 5집 - Band Of Dynamic Brothers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Joss Stone - Colour Me Free
Joss Stone - Colour Me Free

괴물의 탄생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촌놈들의 제국주의

예수전
예수전

박쥐
박쥐

윤상 6집 - 그땐 몰랐던 일들
윤상 6집 - 그땐 몰랐던 일들

괜찮다, 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Michael Jackson - Invincible [재발매]
Michael Jackson - Invincible [재발매]

나목.도둑맞은 가난
나목.도둑맞은 가난

이소라 7집 [통에 든 포스터 증정]
이소라 7집 [통에 든 포스터 증정]

조직의 재발견
조직의 재발견

Eric Clapton - MTV Unplugged
Eric Clapton - MTV Unplugged

박정현 6집 - Come To Where I Am
박정현 6집 - Come To Where I Am

속죄
속죄

인 콜드 블러드
인 콜드 블러드

이글루 파인더
rss

skin by zodiac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