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ding Neverland: "Believe"
- 작년 3월경에 심야상영으로 보았던 영화인데 이제서야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한동안 일종의 슬럼프에 시달렸어요. (변명을 하자면) 글을 쓸만한 영감을 주는 영화가 없었단 말입니다.

- 이 글은 지난 <찰리와 초콜릿 공장> 리뷰에 이어서, 트플 초이스 글을 쓰다가 떠오른 생각을 구체화해본 것입니다. 예전에 글을 쓰려다가 타이밍을 놓친 걸 이번에 살려보는 것이기도 하고요. 이후 <개구리 중사 케로로>에 대한 글까지 쓰고 나면 어른-아이 관계에 대한 일종의 트릴로지가 완성될 듯합니다. :-)

- 지금 생각해 보면 조니 뎁은 말쑥한 정통 양복을 빼입은 작가 제임스 배리에 그렇게까지 어울리는 양반은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그는 마치 영화의 상상장면 중에 등장하는 해적선장으로 분한 제임스 배리를 연기하기 위해 캐스팅된 것 같단 말이죠. 그만큼 <캐리비안의 해적>이 남긴 인상이 강하긴 강한가 봅니다.

- 언제나 그렇듯이, 스포일러 범벅입니다.





 

0.

"......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요한복음 20장 28절)


1.

제가 본 연극 <피터 팬>의 유일한 공연 버전은 초등학생 시절 어린이날 TV에서 보았던 뮤지컬 공연실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피터팬 역을 맡았던 배우는 (놀랍게도) 가수 이선희였고요. 실제로 P. J. 호건에 의해 영화화되기 전까지 실제 나이대의 아역들이 <피터 팬>의 주역을 맡은 경우는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한 관객들은 공연을 보면서 눈 앞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열댓 살 짜리 피터 팬이 실은 스무 살을 한참 넘긴 성인 여성이라는 사실을 별로 개의치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 연극은 클라이막스 부분에선 관객들의 신앙을 노골적으로 확인하려고 듭니다. 피터 팬 가라사대 "믿습니까?" 하시니 관객이 화답하길 "I do believe in fariy, I do, I do!"

<네버랜드를 찾아서>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 역시 <피터 팬>의 설정들을 제임스 배리(조니 뎁)의 실제 주변 상황 속으로 흩어놓고 보물찾기를 하는 부분보다는 <피터 팬>의 초연 상황을 재연하는 장면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디즈니의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 버전으로 <피터 팬>을 기억하는 요즘 관객들에겐 무척이나 낯설게 다가와요. 가짜를 진짜같이 보이게 만드는 특수효과를 의도적으로 철저히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피터 팬을 비롯한 모든 배역은 성인들이 맡았고, 가정부 개 역시 사람이 탈을 쓰고 연기했습니다. 그들이 하늘을 나는 장면에는 (모두가 예상하듯이) 굵은 피아노줄이 허공에 난무했으며, 심지어 팅커벨은 거울에 반사된 빛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게다가 배우들의 연기는 지극히 연극적으로 과장되어 있고요. 공연장 객석에 앉아있을 때에는 실제같다고 믿었던 설정들이 영화 스크린을 중간에 끼워놓고 다시 바라보게 되자 그 판타지가 여지없이 발가벗겨진 것입니다. 그러자 영화가 제기하는 의문 역시 명확해집니다. 극작가 제임스 배리는 무슨 재주로 관객들을 "믿게" 만들었는가 하는 거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영화는 제임스 배리가 살던 20세기 초 영국으로 돌아가서 어느 날 배리 앞에 나타난 실비아 데이비스(케이트 윈슬렛)라는 미망인과 피터(프레디 하이모어)와 마이클 등의 그녀의 네 아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영화는 <피터 팬>이 배리가 실비아 가족과 "상상력"을 교감하면서 만들어낸 작품이자, 병으로 죽어가는 실비아를 상상의 나라 네버랜드로 떠나보내는 일종의 굿판이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간단한 줄거리 요약은 어린이의 동화적/놀이적 상상력을 예찬하는 <피터 팬>의 전통적인 해석으로 맥없이 회귀하고 맙니다. 영화는 그 전통을 동어반복하는 대신, 상상력보다는 "믿음"의 문제에 방점을 찍습니다. 그리고 그 방점이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지점은 영화의 중심 플롯에 해당하는 제임스 배리와 피터의 대립구도입니다. 제임스 배리는 실비아의 다른 아들들처럼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팥을 콩이라 하면 콩이라 믿을 수 있는 심성의 소유자이지만, 피터는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캐릭터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갈등은 곧 상상하느냐/하지 않느냐, 상상할 수 있느냐/없느냐가 아닌, 믿느냐/믿지 않느냐의 형질대립입니다. 영화가 의도하는 메시지 역시 이 대립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 있고요.

 

2.

그 첫번째 메시지는 "믿음"의 개념을 "상상력"의 개념과 연관지어 낯설게 하고, 그 정의를 새로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믿는다"는 단어나 행위에 그 대상이 진실하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경향이 있는데요,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먼저 그것이 일종의 착각임을 폭로해 버립니다. 그 단적인 예로, 피터는 그의 아버지가 암으로 죽기 전까지만 해도 그가 기관지염을 앓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피터는 눈에 보이는 현상만 받아들이는 도마 같은 모습을 보이게 되고요. 형제들과 나무총 놀이를 하면서도 나뭇가지는 총이 될 수 없는 그저 가지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믿는다"는 행위는 어떤 특정한 주체가 진실하다고 생각한다는 정보만을 제공할 뿐, 그 믿음의 대상이 객관적으로 참이라는 정보는 주지 않습니다. 결정적으로, 이건 영단어 "believe"의 용법을 살펴봐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 단어는 보통 "~는 ~라고 생각한다"는 뜻으로도 번역되기도 하거든요. 사고는 오직 사고일 뿐, 그것이 진실성까지 필연하지는 않지요.

문제는 이 착각이 너무 광범위하게 퍼져버린 나머지 "믿음"이 곧 "진실(truth)"인양 왜곡되는 경우입니다. 피터의 "비뚤어져버린" 마음 역시 그 착각을 가지고 피터를 기만한 어른들과 자기 자신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더불어 피터의 모습은 그런 착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믿음"이 공허한 "광신"에 지나지 않음을 명확히 보여주기도 합니다. (게다가 이는 최근 황우석 박사 사태에 비추어 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지요.) 그렇게 피터는 이미 아버지의 죽음으로 "믿음"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곧 어머니 실비아의 죽음이 닥쳐옵니다. 이번엔 기관지염 같은 거짓말로 그를 적당히 속일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제임스 배리가 피터를 위해 제시하는 대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입니다. 네버랜드가 바로 그런 대상이고요. 제임스 배리는 실비아에게 죽은 형이 어떤 성장과 죽음과 슬픔도 없는 네버랜드로 갔다고 믿었다고 고백하고, 그 네버랜드를 <피터 팬>에 풀어놓으며, 종국에는 <피터 팬> 공연을 통해 실비아를 네버랜드로 떠나보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실비아가 네버랜드로 갔다는 믿음은 그녀의 죽음을 전제한다는 점입니다. 피터와 제임스는 네버랜드가 판타지에 지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러는 게 그냥 앉아서 실비아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확인이라도 하듯, 실비아는 팅커벨이 부활하는 장면에서 연극의 조야한 세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진짜처럼 눈앞에 펼쳐진 네버랜드의 판타지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 순간 믿음의 정의는 머릿속의 상념에서 직접적인 행동의 개념으로, "나의 믿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헛된 것일지라도 믿는 것"으로 전환됩니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그 믿음의 힘은 더욱 강해지는 셈이고요.

 

3.

여기서 도출한 믿음에 대한 정의를 바탕으로 살펴볼 수 있는 두 번째 메시지는 문학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자는 메타문학적인 제의입니다. 이 영화가 생각하는 문학은 기본적으로 온통 상징과 기호로 꼭꼭 뭉친 덩어리 같은 거예요. 그런데 이 기호를 구성하는 기표와 기의는 어떤 필연적인 이유로 짝지워지지 않습니다. 곰을 곰이라고 부르고 총소리를 반드시 "bang bang"이라고 써야 할 이유는 없다는 거죠. 이런 기호의 특징은 개개인이 원한다면 개를 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언어의 균열을 만들어냅니다만, 그 균열은 반대로 근사한 문학적인 상징[비유]으로도 작동합니다. 개와 춤을 추는 제임스 배리를 곰과 춤을 추는 서커스 단장으로 바꿔놓거나, 피터를 납치한 인디언 제임스 배리가 "나는 너를 자식처럼 키웠다"고 말하는 장면이 그런 예입니다. 그러나 피터는 그런 비유조차 당신은 우리 아빠가 아니라며 거부합니다. A는 A라고 말해야지, B라고 말해선 안된다고 생각하는 셈입니다.

물론 이런 피터의 신조는 정직한 것이고, 어느 정도 정당한 설득력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의 상징체계는 어디까지나 1차적인 사전적 의미에만 한정되어 있을 뿐, 그 이상의 2차 3차의 의미부여는 할 수 없지요. 피터가 지금에도 살아있었다면, 그에게 코카콜라는 까만 빛깔의 청량음료일 뿐이지 미국 대중문화의 상징으로 보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제임스 배리가 피터에게 글쓰기를 제안하고, 피터가 실제로 연극을 쓰는 플롯은 무척이나 의미심장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옮기는 행위. 글이란 상징물은 우리 생각을 100% 반영하지 않습니다. 글이라는 상징물을 만드는 행위는 기표와 기의가 결코 같지 않음을, 그리고 기표의 껍데기에서 본질의 기의를 발견해야 함을, 기표와 기의 사이에 필연적으로 걸쳐있는 "믿음"의 과정을 깨닫게 만들어줍니다. 배리의 대사를 한 줄 옮겨볼까요. 배리는 "나무 조각을 가지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걸 멋진 금 지팡이로 느끼게 만드는" 것이 작가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은 배리의 다른 상상으로 확장됩니다. <피터 팬>은 침대에서 뛰어노는 데이비스 형제들의 모습에서 발견한 하늘을 나는 웬디 남매의 비전이나, 갈고리를 들고 형제들을 꾸짖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발견한 후크 선장의 비전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피터 팬>은 상상한 것을 "그대로 옮기는" 것에서 끝나지 않지요. 수용자에게 그 비전을 "믿게" 만드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 합니다.

이런 문학의 특성은 본질적으로 논란의 여지를 안고 있습니다. <피터 팬>이 일종의 판타지 문학이라는 점에서 이 점은 더욱 명확해집니다. 판타지 문학을 둘러싼 가장 큰 논쟁점은 바로 진짜 현실이 아닌 가짜 환상으로 현실도피를 유도한다는 비판이었으니까요. 인디언 서부극 놀이와 해적놀이를 하면서도 가짜 설정을 거부하면서 "흥을 깨는" 피터의 모습은 그런 비판가들을 영락없이 빼닮았습니다. 그들의 비판의 요지는 이런 겁니다. 대체 이런 "흥"이 무슨 도움이 되느냐는 거죠. 물론 그런 유희가 밥을 먹여주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비판은 다분히 가치판단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문학은 본질적으로 기호와 상징 덩어리인 "뻥"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몇십 년 전 소설을 "나부랭이" 취급하며 아이들의 손에서 빼앗던 많은 어른들의 폭력 역시 여기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문학과 영화, 게임 등의 존재는 인간이 그 단순한 "흥"만으로도 충분히 판타지를 필요로 함을 보여주고 있죠.

<네버랜드를 찾아서>의 결말에 등장하는 실비아의 죽음 역시 현실 속에서 판타지가 필요한 지점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습니다. 영화는 그 현실도피의 위험성을 아예 대놓고 내세웁니다 실비아의 죽음은 그 모든 상징의 유희를 무용하게 만들어 버리지요. 그녀의 고백처럼 죽음 앞에서 "아프지 않은 척" 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녀의 죽음은 남은 자들에게 네버랜드의 존재를 더욱 절실하게 만들어 줍니다. 저는 앞에서 제임스 배리와 피터의 네버랜드에 대한 믿음이 "그냥 앉아서 실비아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기 때문"이라고 했는데요, 이는 판타지 장르에 대한 비난처럼 바보같은 현실도피일 수도 있고, 도를 넘어선 유미주의일 수도, 혹은 피터의 말처럼 "있지도 않은 일을 있었던 것처럼 속이는 한심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그들의 판타지는 "보다 순수한 유희[네버랜드]를 찾아서" 떠나는 여정임이 간과되어서는 안됩니다.

 

4.

문학이 재미를 위한 상징놀이라는 영화의 시각은 성장의 주제를 깊이 파고들어가는 세 번째 메시지와 연결됩니다. 이 영화가 바라보는 어른과 아이의 기준선은 꽤 단순하면서도 그래서 복잡하기도 해요. 아이는 어떤 이해관계도 얽히지 않은 채로 자유로운 놀이를 즐길 수 있지만, 어른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아이들의 소꿉놀이는 그 자체로 "너는 아빠, 나는 엄마" 식의 롤플레이가 이뤄지는 명백한 (문학적) 상징 덩어리입니다. 아동은 그 롤플레이를 어떤 심각한 의미부여 없이도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른의 경우 그 롤플레이를 이해하려면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얽어놔야만 합니다.

제임스 배리와 실비아 가족의 관계가 바로 그런 소꿉놀이 같은 관계입니다. 그들은 언제고 마음대로 역할을 바꿔서 놀 수 있어요. 제임스 배리는 인디언 추장이 됐다가 해적 선장이 되기도 하고, 실비아는 피터 형제의 엄마이면서도 그 아들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널빤지 위로 밀어 바다로 빠뜨리는 선장 제임스 배리의 충실한 부하 해적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실비아 가족 안에서 어른과 아이의 롤플레이는 뒤집힙니다. 제임스 배리와 실비아는 아이처럼 상징놀이에 열중해 있고, 거꾸로 피터는 현실 안에 묶여버린 나머지 그 상징의 속임수를 혐오하며 부정합니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제임스 배리는 피터의 아버지를 대체할 수 없다고 낙인찍어버리는 피터의 심리는 제임스 배리와 실비아의 관계를 불륜으로 "믿고" 싶어하는 어른들의 그것을 닮아 있어요. 그러나 그런 어른들의 생각은 아이러니하게도 제임스 배리와 실비아 가족에 대한 불신[disbelieving]이자 의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어른들의 비뚤어진(?) 믿음의 방식을 무조건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 저는 믿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이라고 정의했는데, 문학적 상징의 판타지를 믿는 것 역시 이렇게 현실의 이해관계를 전제한 가운데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제임스 배리와 실비아가 시도하는 상징놀이는 피터 형제의 커뮤니티 안에 있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제한적인 퇴행이기도 합니다. (피터 형제 그룹 바깥에서 제임스 배리가 아내의 불륜을 깨닫는 건 전형적인 어른들의 방식입니다.) 그런 퇴행은 언제까지나 가능하지 않습니다. 웬디는 어른이 되어야 하고, 어른이 된 후크 선장은 똑딱거리는 시계[시간]의 공포에 쫓겨다녀야 하며, 피터는 어른이 되어야 하고, 실비아는 죽음을 맞이해야만 합니다.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화가 말하는 성장은 아이의 무제한적인 믿음이 피터나 다른 어른들처럼 믿음과 불신의 범벅으로 바뀌는 것이 됩니다. 피터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른들에 대한 의심과 불신을 배우고, 어머니의 죽음으로 네버랜드를 만나면서 그 불신 가운데 숨어있는 믿음의 존재를 다시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성장의 과정 안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은 바로 "앎"이라는 삶의 불가피한 요소임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아이의 눈은 오히려 무지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더 잘 상상하고, 더 잘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피터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면에선 자기 기만이기도 합니다. 아는 것이 늘어날 수록 우리는 믿어야 할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되고, 그 믿음은 점점 의심과 불신으로 채색되어 순수함을 잃어버리기 마련이지요. 요즘 아이들은 "너무 일찍 알아서" 요정 따윈 믿지 않는다는 피터 팬의 푸념을 상기해 보세요.

그래서 제임스 배리가 제시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은 그 영역을 <피터 팬>과 같은 합법적인 판타지 안에 제한시키더라도 무척이나 어려운 작업입니다. 아이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I do believe in fairy"라고 말할 수 있지만, 어른들에게는 그게 결코 100% 진심일 수는 없지요. 의심하고 불신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성장의 과정이며, 자기 기만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어른만이 취할 수 있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러면서도 "보지 않고 믿기를" 욕망하고 있어요.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궁극적으로 <피터 팬>은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고 싶어하는 어른의 욕망을 끌어내고 있는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거기엔 문학이라는 제도권 안의 상징놀이로만 그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게 된 어른 제임스 배리의 슬픔이 잔뜩 배어나오고 있고요. 어떻게 하면 죽은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느냐는 피터의 질문에 배리는 네버랜드를 상상하라는 대답 대신 "그냥 믿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그런 행위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by lyh1999.
2006/01/05
by lyh1999 | 2006/01/05 03:01 | The Works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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