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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Watch, and Learn.

- 공교로운 타이밍으로 올림픽 특집 포스팅이 되었습니다. (절대 의도한 건 아닙니다!)

- 포스터에 나온 배우들 사진이 아이돌 그룹 같다고 느낀 건 저뿐일까요......???




전반전. '세계 최초의 핸드볼 영화'라는 자체 타이틀을 앞세우고 보면 이 영화는 어디서도 듣도 보지도 못한 어떤 독특한 별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2004년에도 그랬듯이) 핸드볼이란 스포츠를 잘 모를 뿐더러 그리 큰 관심도 없습니다. (이제와서 까칠한 말이지만 지금의 우생순 열풍의 상당부분이 냄비근성에 기댄 가식이라고 생각하는 건 저뿐일까요?) 더구나 이 영화는 여성 핸드볼 선수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핸드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는 핸드볼 시합보다는 그 이전의 훈련 과정에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는데다가, 핸드볼 경기 장면이 실제 경기보다 감흥이 덜하다는 반응은 이미 여기저기서 나온 바 있습니다.

후반전. 이 지점에서 스포츠 영화 <우생순>을 "패스"해버린 사람들은 여성영화 <우생순>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시 하지만. <우생순>이 예찬하는 여성성(혹은 "아줌마의 힘")은 관객이 예상할만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서 조율되어 있습니다. (황진미의 말을 빌어) "끈질기고 관계 지향적이며 약자를 보듬는 아줌마성"을 이 영화에서 찾아낸 여성성의 미덕이라고 칭찬한다면 그건 우리가 이전부터 여러 차례 들어온 예찬의 반복입니다. 게다가 좀 편협한 소리이기도 해요. 사실 주변을 돌아보면 그런 (혹자는 미련하고 바보같다고 코웃음칠) 사람들은 남자들 중에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사견을 전제하고 말한다면 요즘 남성성/여성성을 논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까먹고 넘어가는 것 같아요. 여성성/남성성을 지나치게 각 신체적 성의 고유한 특질로 몰아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 그러니까 문제는 <우생순>은 좋은 영화 같은데 <우생순> 자체만 놓고 보면 지나치게 무난하게 좋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영화의 줄거리나 연출은 대중영화의 틀 안에서 크게 모나지 않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해서 무언가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무엇이 어떻게 좋다고 말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연장전. 이 시점에서 제가 제안하고자 하는 방법론은 타임머신을 뒤로 돌려 비교대상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영화 씬에서 <우생순>과 가장 비슷한 카테고리 안에 위치시킬 수 있는 영화가 뭐겠습니까? 저는 이준익 감독의 <즐거운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조: 즐거운 인생: 불온식품)

<즐거운 인생>은 뒤늦게 광대놀이에 빠져든 아저씨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우생순>과 함께 현재 한국의 장년층들이 빠져든 삶의 고통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짝을 지어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즐거운 인생>의 아저씨들은 돈벌이도 안 되고 가족들에게도 외면당하게 되자 그 탈출구로 아마추어 밴드를 결성하고, <우생순>에서 세계 수준의 기량을 자랑하는 아줌마 선수들은 빚에 쫓기고 이혼경력 때문에 손가락질 당하고 약물복용으로 불임이 되면서도 핸드볼 팀으로 기어들어옵니다. 방금 쓴 문장에서 혹자는 이미 두 영화의 결정적인 차이를 발견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차이는 "되자"와 "당하면서도"의 차이입니다. 고통 앞에서 아저씨들이 허무주의적 유희로의 도피를 택한다면, 아줌마들은 그 고통을 그래도 어떻게든 버티고 견뎌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태도는 결국 가치관의 문제이므로 굳이 어느 한 편에 손을 들어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주목할 것은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즐거운 인생>의 플롯은 (링크한 이전 글에서 지적한대로) 아저씨들의 밴드놀이가 밴드를 중심으로 하는 주변 사람들(그들의 가족을 비롯한 관객들)을 반강제로 질질 끌고 다녀야만 가능하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밴드의 공연(연습 말고!)은 그 질과 관계없이 관객들의 성원과 호응을 전제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생순>의 선수들은 관중이 있든 없든 핸드볼 공을 던집니다. 실제로 2004년 경기를 중계했고 영화에서도 캐스터 역할을 맡은 최승돈 아나운서는 한국 응원단이 없어 자신이 해설위원과 함께 응원하는 역할까지 해야 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핸드볼은 그들에게 주어진 거의 몇 안 되는 당위입니다. 그러므로 <즐거운 인생>과 <우생순>의 차이는 여기서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해야 하는 것"의 차이로 변신합니다.

두 영화는 공통적으로 밴드/핸드볼의 존재와 관계없이 우리의 인생이 이전부터 험난했으며, 지금과 미래도 그러할 것임을 공공연히 내비치고 있습니다. 특히 <우생순>에서 미옥(문소리)의 남편(박원상)은 자살을 시도하며, 그 충격 가운데서 핸드볼 경기장으로 돌아온 미옥의 승부던지기는 실패하고 맙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줄거리를 영화 스스로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명명한다는 점입니다. 사실 승부던지기를 앞두고 이를 언급하는 감독 승필(엄태웅)의 대사는 다소 작위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다소 어설픈 감동의 강요로도 보입니다. 하지만 미옥에게 그런 순간이 소속팀 해체 + 채무 + 중태에 빠진 남편 등등의 중대한 위기들 속에서 찾아온다는 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런 장치가 관객들에게 설득력이 있을까요? 전 있다고 생각합니다. 패색이 짙은 게임판에서 <즐거운 인생>의 아저씨들이 "아 난 몰라, 나 안 해, 나 안 해"라며 물러났을 때 <우생순>의 아줌마들은 "어휴, 이 찌질한 화상들!" 하고 타악 침을 한 번 뱉어주고서 여전히 필드를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진짜 미덕은 타인을 보듬는 자세보다는 삶에 어떻게든 맞서고 뛰어들려는 태도에 있습니다. 게다가 그 뛰어들기란 (정성일의 표현을 빌어) 무모한 '자살적 제스처'라기보다는 남의 시선 신경쓰지 않고 묵묵히 버티고 견디는 것이라는 점에서 매력을 발산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즐거운 인생>은 '불온식품'의 타이틀을, <우생순>은 '건전식품'의 타이틀을 획득합니다. <우생순>이 지나치게 무난하게 보이는 이유도 아마 이 때문이지 않을까요? 어쨌든 이 아줌마들은 저 아저씨들 앞에서 "자, 보고 좀 배워!"라고 말할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 단 그 주체가 반드시 여성이거나 아줌마여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걸 덧붙여둬야겠지만요.


by lyh1999
2008/08/17

by lyh1999 | 2008/08/17 14:34 | Journals | 트랙백 | 덧글(2)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2

"...... 그가 먼저 입을 여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만일 그때 누군가에게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 젊은이는 대체 어떤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들어있을가 하는 질문이 떠오른다고 해도 그를 바라보면서 어떤 실마리를 풀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따금씩 집 안에 있을 때나 마당 혹은 거리에 있을 때에 걸음을 멈춘 채 10분 가량 제자리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서 있곤 했다. 관상쟁이가 그의 얼굴을 본다면 그는 어떤 명상이나 생각이 아니라 그저 관조에 잠겨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화가 끄람스꼬이의 작품 중에는 '관조자'라는 제목의 뛰어난 그림이 잇다. 그 그림 속에는 겨울 숲이 그려져 있고, 그 숲 사이로 난 숲길에는 낡은 농부복에 짚신을 신은 지독하게 외로워 보이는, 깊디깊은 고독 속에서 길을 잃은 농부가 서 있는데 마치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관조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와 부딪힌다면 그는 깜짝 놀라서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넋이 빠진 채 당신을 바라볼지도 모른다. 물론 곧 정신을 차리기야 하겠지만 거기 서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틀림없이 아무 기억도 해내지 못하고 자기가 관조하고 있는 동안 받은 인상만을 마음속에 숨겨 놓을 것이다. 그 인상은 그에게 매우 소중한 것이어서 마음속에 그 인상들을 차곡차곡 쌓아 두기야 하겠지만 왜,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건지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여러 해 동안 그 인상들을 샇아 두던 그는 어쩌면 어느 날 갑자기 만사를 내동댕이치고 방랑과 구원의 길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떠날지도 모르며 어쩌면 갑자기 고향 마을에 불을 지를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저지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민중들 사이에는 이런 관조자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 바로 스메르쟈꼬프는 그런 관조자들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으며 스스로도 그 이유를 모른 채 자신의 인상을 하나하나 쌓아 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


(끄람스꼬이 Ivan N KRAMSKOY 의 그림 "관조자 Contemplation/The Mediatator")


quoted from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상권, 열린책들) p.230~231
written by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translated by 이대우

by lyh1999 | 2008/08/17 11:01 | "Quotes" | 트랙백 | 덧글(0)

케이트 블란쳇

- 개인적인 스크랩 목적으로 올려두는 것임을 밝힙니다. 이 기사에 대한 권리는 듀나와 씨네21에 있습니다.


케이트 블란쳇이 <아임 낫 데어>에서 연기한 밥 딜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그냥 기계적인 것 같습니다. 저처럼 10년 가까이 팬이었던 사람은 블란쳇이 놀라울 정도로 그럴싸하게 밥 딜런의 매너리즘을 흉내낸 것에 경탄하며 무조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겠죠. 하지만 전 그만큼 부정적인 반응도 많이 봤습니다. <아임 낫 데어>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블란쳇의 딜런 연기가 피상적이고 지루하며, 유머가 제거된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식 패러디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요. 전 그들의 반응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정곡을 찌른 비판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아임 낫 데어>에서 블란쳇의 연기는 깊이 있을 필요는 없어요. 블란쳇의 의무는 밥 딜런의 내면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의 공적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것이었으니까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성 배우인 블란쳇을 캐스팅한 것이 더 그럴싸한 겁니다. 특정 배우가 딜런을 ‘흉내낸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스크린에 공공연하게 노출되었어야 했어요.

그러나 블란쳇의 최근 커리어를 보면 조금 걱정이 되는 건 사실입니다. 과연 이 배우가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는 것일까? 지나치게 흉내쟁이의 장기에 치중하는 건 아닐까? 최근 주목받은 블란쳇의 연기를 보시죠. 대부분 아주 성공적인 성대모사거나 악센트 과시입니다. 그것으로 아카데미상도 하나 받았죠. <에비에이터>의 캐서린 헵번 역 말입니다. 좋은 연기였지만 과연 제가 케이트 블란쳇이 다른 할리우드 배우를 흉내낸 것으로 첫 아카데미상을 받길 원했었는지?

그러나 여기에 대해 툴툴거리는 건 블란쳇의 개성과 장기를 무시하는 것이 될 겁니다. 블란쳇은 아주 희귀한 종류의 배우입니다. 변신에 능한 주연급 할리우드 여성 스타죠. 블란쳇처럼 다양한 변신에 능하면서도 여전히 주연배우의 아우라를 간직하고 있는 여성 스타를 아세요? 전 단 한명 압니다. 메릴 스트립이요. 몇 가지 면에서 블란쳇은 심지어 스트립보다 더 희귀합니다. 처음부터 외모에 개의치 않는 연기파 배우로 경력을 시작했고 여전히 그런 이유로 존중받고 있는 스트립과는 달리 블란쳇은 전통적인 여신 숭배의 대상이기도 하거든요. 물론 마릴린 먼로에 대한 여신 숭배와 블란쳇에 대한 여신 숭배의 성격은 많이 다르긴 합니다만.

상식적으로 보았을 때 능수능란한 성대모사의 달인과 스크린 스타로서의 위치는 충돌합니다. 여자들이 특히 더 심하지만 남자들 역시 특별히 다르지는 않습니다. 로버트 드 니로나 알렉 기네스 같은 배우들의 경력에서 스타성과 모방의 재능이 어떻게 공존했는지 한번 들여다보세요. 어느 한쪽이 뜨려면 어느 한쪽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외면과 행동의 철저한 모방으로 캐릭터 작업을 시작하는 케이트 블란쳇의 태도가 오히려 불안한 것이죠. 솔직히 전 <샬롯 그레이>나 <베로니카 게린>의 완벽한 성대모사가 캐릭터의 깊이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샬롯 그레이>에는 캐릭터나 드라마보다 블란쳇의 스코틀랜드 악센트와 프랑스 악센트를 저글링하듯 섞어 쓰는 재주가 더 먼저 들어와요.

오해 마시길. 전 여전히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과 <아임 낫 데어>에서 케이트 블란쳇이 보여준 연기를 좋아하고 그런 변신 능력을 배우의 매력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전 이 배우가 흉내에 조금 덜 신경 쓰고 자신의 모습을 좀더 적극적으로 드러내길 바랍니다. 성대모사에 묻히기엔 이 사람의 스타 퀄리티가 너무 아까워요. 배우란 남을 흉내내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보여주는 사람이기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정말로 중요한 건 후자지요.



written by 듀나
scrapped from 씨네21 663호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3016&article_id=52384)

by lyh1999 | 2008/08/03 15:51 | From the Others | 트랙백 | 덧글(0)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판단유보

- 이 블로그의 글들을 쭉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제가 어떤 영화에 "판단유보" 판정을 내리는 건 처음이라는 걸 눈치채셨을 겁니다. 왜냐면...
 



언젠가부터 느끼고 있는 사실이, 이 정도 규모의 거대 예산을 들인 블록버스터 한국영화가 나오면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나 제각각이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살인의 추억>의 경우엔 송강호가 살인범이란 다소 어처구니없는 가설을 장문의 글로 진지하게 분석한 글까지도 나왔잖아요?) 보통 이런 경우를 두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법" 혹은 "자기가 아는 만큼만 보이는 법" 같은 말을 합니다만...
 
어쨌든, 영화를 두 번 보고 났더니 블로고스피어에선 이미 다른 사람들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놨습니다. 제가 어떤 말을 하고 싶었냐면... 처음 볼 때는 이 영화에는 돈 들인 티는 역력하지만 내러티브도 부족하고 액션도 부족하단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편집이요. 수많은 캐릭터와 복잡한 줄거리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두 번째 봤을 때는 그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줄거리와 캐릭터들을 이미 어느 정도 숙지한 상태에서 보았으니까요. 그 때는 영화가 시도하는 나름의 독특한 재미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어요. 세 번째 보게 된다면 감상이 좀더 좋은 쪽으로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제 사람들이 잘 꺼내지 않는 얘길 하자면... 이 영화에는 웨스턴과 대중오락영화의 기운이 반씩 섞여있는 것 같습니다. 전 김지운처럼 고전영화에 열광하는 시네필은 아니니 이 부분에 대해서 말하기는 좀 조심스럽습니다만, <달콤한 인생> 때도 그랬지만(그 놈의 지겨운 느와르 타령!) 김지운 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마다 왜 그렇게 장르 구분에 집착하는지 모르겠어요. 영화 크레딧 말미에 "WESTERN by Kim Ji-woon"이라는 자막이 뜹니다만, 이 영화는 여전히 헐리우드를 모방하려는 한국식 블록버스터의 욕망에 사로잡혀있습니다. 그건 <달콤한 인생> 때보다도 더 심한데, 지금 상황에서 거의 마케팅을 위한 용어 수준으로 퇴색되고 있는 웨스턴이란 단어를 벗겨내면 이 작품이 어떤 영화를 경쟁상대로 삼고 있는지 보입니다. 그건 바로...




네. <캐리비안의 해적>입니다.
(이전 리뷰 Pirates of Caribbean: Dead Man's Chest: 중간 / Pirates of Caribbean: At World's End: 급안티무한이기주의 참조)

이 영화는 크게 두 개의 플롯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보물지도'를 차지하기 위해 세 놈과 마적떼, 일본군, 독립군 등 다양한 세력이 충돌하는 카오스를 보여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손가락 귀신' 전설을 둘러싸고 세 놈을 연결하는 복선에 관련된 것입니다. 이 중 최고의 총잡이가 되려는 욕망과 상대방에 대한 복수의 욕망을 다루고 있는 후자의 플롯은 누가 봐도 명백히 서부극에서 볼법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전자의 플롯이 후자의 색깔을 심하게 흐려놓고 있다는 겁니다.

이 부분은 보면 볼수록 <캐리비안의 해적>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너무 많아요. 캐릭터들이 떼로 등장해서 맥거핀을 놓고 진탕 싸움을 벌이고, 그 캐릭터들이 각자 편을 갈라서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면서 무한이기주의의 끝을 보여줍니다. 그 가운데 코미디와 눈돌아가는 액션이 감초처럼 들어가고요. 혹자는 <인디아나 존스>를 거명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외전이 필요할 정도로 프리스토리(pre-story)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거나, 너무 거대한 이야기를 다루다보니 군더더기로 지적되는 부분이 있다거나 하는 점은 <인디아나 존스>에선 찾아보기 힘든 특징이고요.

(사족으로 덧붙이자면... 이 영화를 보면서 제가 했던 가장 웃기는 상상이란 제작 스탭들과 투자자들이 서로 삿대질하면서 싸우는 장면입니다. 그러다가 투자자 측에서 한 방 날리는 겁니다. "나는 웨스턴이고 이스턴이고 관심 없어요. 나는 이 영화를 <캐리비안의 해적>이나 <인디아나 존스> 류의 폼나는 액션 어드벤처로 제작할 거란 말이요!" ...... 물론 이런 말다툼이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대중영화로서 부여된 액션 어드벤처의 정체성을 너무나도 적극적으로 껴안고 있으니까요.)

<놈놈놈>의 내러티브가 빈약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 역시 이 영화에서 정교하게 설계된 온갖 설정과 줄거리들이 편집 과정에서 대거 잘려나갔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가민군 님의 <놈놈놈> 뒷이야기 포스팅 http://kamin.egloos.com/4517583 / http://kamin.egloos.com/4524617 을 참조하시길) 앞에서 외전 이야기를 언급했는데, <캐리비안의 해적>의 팬들이 데비 존스와 티아 달마의 뒷이야기를 상상한다면, <놈놈놈>의 마니아들은 잘려나간 박도원(정우성)과 송이(이청아)의 에피소드를 자기 눈으로 거대한 스크린에서 볼 수 있기를 학수고대할 것입니다.

이쯤이면 슬슬 이 영화에 대한 제 태도를 눈치채실 법도 한데... 사실 저는 이 영화가 (의도한 결과는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캐리비안의 해적>을 노골적으로 흉내내고 있다고 해서 그게 마이너스가 된다고 보지 않아요. 저는 <놈놈놈>이 품고 있는 '한국판 <캐리비안의 해적>'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는 편입니다.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영화에 기대한 미덕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상영중인 버전의 영화와 뒷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놈놈놈>은 정말로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놈놈놈>을 패러디했던 <무한도전> '돈가방을 들고 튀어라'가 무한도전 출연진의 캐릭터에 <놈놈놈>의 컨셉을 씌우고선 <캐리비안의 해적> 식 보물찾기 추격전을 벌인 것도 그 기대치에 대한 반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한 재미로 치면 <무한도전>이 <놈놈놈>보다 더 잘했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공교롭게도 <무한도전>은 돈가방 특집 이후에 '태리비안의 해적' 특집을 내보냈지요!)

그러므로 제가 이 영화에서 더 이상의 판단을 유보하는 것은 아직 <놈놈놈>이 미완성 상태에 가깝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칸 영화제에 들고나갔던 인터내셔널 컷을 상영한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만 그것 역시 제 성에는 차지 않습니다. 인터내셔널 컷은 늘어지는 내러티브를 좀더 컴팩트하게 모은 버전이라곤 합니다만, 이 영화는 자기가 갖고 있던 것을 100% 보여주기 위해선 최소한 2부작 혹은 3부작 정도의 체제로 등장해야 했습니다. 저는 이 영화의 디렉터스 컷, 인터내셔널 컷이 아닌 확장판(Extended Cut)을 볼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진짜 리뷰는 그 다음에야 가능할 것입니다. 물론 이 결론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놈놈놈>에서 감독이 의도한 것을 읽어낸 것이 아니라 제가 보고 싶은 것만 본 결과라는 걸 전제로 해야겠지만요.


by lyh1999.
2008/08/03

by lyh1999 | 2008/08/03 13:56 | Journals | 트랙백(1) | 덧글(7)

어른, 어디 없소

- 샘터 잡지 인터넷 사이트에도 올라오지 않은 글이며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스크랩 목적으로 올려두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이 글에 대한 권리는 김어준과 샘터사에 있습니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턱없는 주제에 여러 지면 통해 남들 고민을 상담씩이나 하게 된 지가 그럭저럭 몇 년이다. 시답잖은 답변일지언정 응대한 사연이 족히 세 자릿수에, 그리 못한 수가 그 몇 배니 그 덕에 대한민국의 일반인들이 대체 어떤 사적 고민을 안고 사는지에 대한 대략의 윤곽은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데이터든 일정량 이상 축적되면 최소공배수가 발견되기 마련. 그동안 접한 거의 모든 고민은 다음 몇 가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직업에 대한 고민들, 사랑에 대한 고민이든, 미래에 대한 공포, 그 두려움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황망해들 했다. 사실 불확실한 걸 무서워하는 것까진 전혀 문제없다. 그게 두려워 징징거리는 것까지도 누구나 하는 짓이고. 문제는 공포. 그 자체를 문제 삼는다는 거다. 불확실성은 삶의 본질인데. 무서운 건 너무 당연한데. 그 무서움에 어떤 방식으로 맞서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를 결정하는 건데. 대부분은 무서움, 그 자체를 무서워한다. 그래서 무서움이 아예 사라지길 원한다. 자궁 속 태아 이외 그런 건 없는데 말이다.

두 번째. 자신이 언제 행복한지 스스로도 모른다.
그래서 남들한테 물어선 도저히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을 그렇게들 해댄다. 예를 들어 누구와 만나고 누구와 헤어져야 하느냐 따위의 질문들은 결국 스스로 어떤 삶을 원하는지, 삶에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 그 행복을 얻기 위해 대가로 어디까지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에 달렸다. 그러니까 그런 고민은 결국 자신밖에 답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본원적 질문은 건너뛰고 그저 남들은 어떻게 선택했는지만 궁금해한다. 자신이 언제 행복한지 스스로도 모르니 그럴 수밖에.

세 번째. 자신이 너무 중요하다.
물론 다들 자신이 중요하다. 그런데 유별난 고통은 자신이 겪고 있는 통증만은 특별히 유난하고 각별하다 여기는 데서 출발한다. 그래서 왜 하필 자기만 그런 걸 겪어야 하는 건지 억울해하고 분해한다. 그러나 한 편의 소설이라며 풀어놓는 좌절과 분노의 내막을 듣고 보면 그 정도 갈등 없이 세상 사는 사람 대체 어디 있나 싶은 정도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자기 돌보는 데만 여념이 없다 보니 남들 고통은 어떤지 살필 감성이 부족한 게다. 이 공감 능력의 결여는, 이기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객관화가 안 됐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 게다.

나이와 학력에 상관없이 발견되는 이들 공통점의 공통점이 또 있다. 뭐냐. 어른스럽지 않다는 거. 사회경제적으로 명백한 성인이어야 할 나이와 위치인데, 어른이, 아니다. 하여 지난 몇 년간 상담 끝에 나름 도달한 결론은 이렇다. 최근 우리 사회가 어른 육성에 실패하고 있다고. 내가 언제 행복한지 알고 담담하게 삶의 불확실성을 스스로 맞서는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된다. 그런 어른을 만나기가, 매우, 어려운 세상이다.

근데 이 성장 지체는 대체 누구 탓일까...


written by 김어준
scrapped from 샘터 2008년 4월호

by lyh1999 | 2008/08/03 10:33 | From the Others | 트랙백(6) | 핑백(1) | 덧글(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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