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우시절: I (Hope You) Understand
- 두산인프라코어의 PPL 노출이 아주 노골적인 영화입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셨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최근에 우석훈의 <조직의 재발견>과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막 끝낸 터라 지진의 상흔 위에 서 있는 건설장비 위에 그려진 그 상표를 보는 게 좀 불편했습니다. 국내에서 과포화 상태에 이른 국내 건설 자본이 제국주의적인 방식을 빌린 해외 진출로 결국 일종의 '건설 파시즘'을 이룰 거라는 경고가 계속 생각나더라고요.

- 스포일러 경고 있습니다.



먼저 전제하고 넘어가야 할 것. <호우시절>을 다 보고 나서 이 영화가 흥미롭다고 생각한 이유는 허진호식 멜로영화로서의 포지셔닝 때문이 아니었다. 은연중인지 의도적인지 잘 묻혀버리는 사실이 있는데, <호우시절>은 원래 단편을 장편으로 확장한 영화이고 그 단편은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중국 사천의 도시 청두를 주제로 한 옴니버스 영화의 한 조각이었다.

허진호가 <호우시절>을 장편으로 만들면서 청두라는 컨텍스트에서 얼마나 탈출하려고 노력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애초에 청두를 바탕으로 시작한 때문인지 이 영화의 멜로는 청두라는 거대한 주제(혹은 소재)를 초월한 것 같진 않다. 황진미는 이를 두고 허진호식 멜로가 이데아적이기보다는 구체적 상황에 기반한 현상학적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그의 평에 고개가 쉬이 끄덕여지는 것도 다른 영화들에 비해 (어쩌면 허진호의 전작보다도) 시공간적 배경이 영화 전반을 아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호우시절>은 여전히 멜로보다는 청두와 청두에 사는 중국인들에 관한 이야기로 읽힌다. 내가 <호우시절>에서 본 것은 30줄에 들어선 두 아시아인의 자유로운 국제적 로맨스보다는 건설 자본을 배경으로 외국에 진출한 한국인이 타자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었다. 동하는 유학시절 만난 메이를 잘 알았고 사랑했다고 생각하지만, 메이는 그 기억을 부정하는 일종의 타자가 되어 있고, 동하는 둘 사이엔 좁혀지기 힘든 어떤 간극이 존재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영화 후반에 밝혀지지만) 그 간극의 기원에는 작년 봄 사천에서 일어난 지진 사건이 있었다.

<호우시절>이 상기시키는 지진은 관객들에게도 그 간극을 상기시키기에 썩 괜찮은 소재로서 기능한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지진 당시의 상황을 담은 다큐멘터리 클립과 한국에서 건너온 ('DOOSAN' 마크가 선명한) 건설장비가 육중하게 서 있는 무너진 건물 현장을 보게 되고, 마지막에 다다라서는 차 사고를 내고 기절하는 메이, 남편의 영정에 돼지내장탕면을 올리며 흐느끼는 메이를 보게 된다. 현지 지사장과 함께 지진 현장을 방문한 동하는 "실제로 보니 더 처참하지 않느냐"는 지사장의 말에 심드렁하게 반응하지만, 왠지 모르게 슬퍼보이는 메이를 보고 무의식적으로 "Those distant painful memories(저만치 멀어지는 고통스런 기억들)"라는 싯구를 끄적이고, 그녀의 사정을 알게 된 후로는 한국으로 돌아가 그녀에게 자전거를 보낸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동하가 메이[를 비롯한 청두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이해하게 되는 두 가지 방식을 접하게 된다. 역사적/사회적 맥락에서 튀어나온 선정적인 이미지의 전시를 곁눈질하기, 그리고 "the one"의 가장 사적/감성적인 맥락에서 튀어나온 감정을 받아들이기. 얼핏 보면 덮어두고 후자의 방식을 지지해야 할 것 같지만, 우리는 곧 이 두 가지 방식이 <호우시절>에서 서로 엉켜 균형을 이루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전자의 재료가 없었다면 동하는 결코 메이의 기절을 100%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 동하와 메이의 관계가 다시 복원될 거라는 암시를 남겼다고 받아들이는 것 같은데, 나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호우시절>에 여전히 멜로영화로서의 강박을 지우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반응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동하가 나름의 방식으로 메이의 상처를 이해했고 메이가 그것을 극복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지 두 사람이 굳이 사귀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나아가 <호우시절>은 멜로영화로서 질이 떨어진다고 깎아내리기보다는 청두를 소개하고 알리는 관광영화(...)로서의 미덕을 칭찬해줘야 할 영화이다. (오해하지 마시길, 이건 절대 비판이 아니다.) 물론 씬의 상당부분이 두보초당을 비롯해 청두의 아름다운 풍광을 과시하는데 할애되고 있지만, 영화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청두의 그늘까지 아낌없이 응시할 줄 아는 용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메이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관객들이 받아들일만한 수준에서 공감시킨다. (내가 이 영화를 좋은 쪽으로 본 것도 그 감정의 깊이란 것이 내가 견딜만한 수준으로 적당히 조절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영화가 이미지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전시하는 방식, 나아가 관객이 등장인물의 감정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낯익은) 화두를 넌지시 던지기도 한다. 불현듯 수전 손택의 책을 다시금 손에 잡고 싶어진다. 그녀가 뭐라고 했던가...?


2009/10/19
by lyh1999.
by lyh1999 | 2009/10/19 15:23 | Journals | 트랙백 | 덧글(2)
저도 한/글 2010 씁니다.

유치한 인증샷 일단 올리고... :-) 파일에 적혀 있는 블로그 주소는 포토샵으로 새긴 워터마크가 아니라 한/글 작업창에서 직접 입력한 겁니다.

여긴 IT 관련 블로그가 아니고, 저도 그리 부지런한 블로거가 못되는지라(사실 이 포스팅도 지난주쯤엔 올라갔어야 했습니다) 선정가능성은 그리 높게 치지 않았는데, 한컴 분들께서 저를 어여쁘게 봐 주신 모양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유용한 포스팅을 선점(...)하신지라 무슨 얘길 쓰는 게 좋을지 참 고민되네요.

그래도 많은 분들이 지나치신, 하지만 눈이 번쩍 뜨일 유용한 정보를 하나 알려드리자면... 위 캡쳐 그림을 보시면 눈치빠른 분들은 이미 알아챘을 겁니다. 2010 버전 한/글에 윤디자인연구소에서 협찬한 폰트가 번들로 탑재됩니다. 소망, 바겐세일 같은 폰트들이야 출시된지도 한참 됐고 이미 인터넷 상에 불법복제로 잔뜩 유포돼서 신선미가 좀 떨어지는 면이 있습니다만... 몇년 사이 "무한도전체"라는 별명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윤체도 있고, 날렵한 손글씨로 최근 대박(...)을 친 쿨재즈도 들어있습니다. 막연하게 저런 폰트 어떻게 써보나 군침만 삼키신 분들에겐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다음 포스팅을 궁리하러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럼...
by lyh1999 | 2009/10/13 09:27 | 트랙백 | 덧글(3)
한/글
- 한컴에서 오피스 새 버전 출시를 앞두고 베타테스팅을 진행한답니다. 여기 포스팅에서 신청할 수 있습니다.

- 워드프로세서 한글은 인터넷 상에서 "한/글"이라고 적는 게 정석입니다. 이름에 고어 자모인 아래아(ㆍ)가 들어가기 때문에 이를 표현해 줄 수 없는 환경에서는 이렇게 쓰도록 한컴에서 정해 놨어요. 표기상 우리말 한글과도 구분할 필요도 있고요... 꽤 옛날 일인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죠. 고유명사인 "한글과컴퓨터"를 "한글과 컴퓨터"라고 꼬박꼬박 고집스럽게 띄어쓰는 것도 그렇고. 일반인들은 몰라도 특히 신문기자들은 좀 반성하셔야 돼요.

- 베타 테스터로 뽑히고 싶어서 포스팅한 거냐고 물어보신다면... 반쯤은 맞습니다. (......) 나머지 반은 지극히 사적인 추억놀이.





컴퓨터를 처음 쓰기 시작한 게 초등학교 3학년 때쯤이고... 한/글을 처음 쓴 건 초등학교 5학년... 대기업 컴퓨터 번들판으로 들어온 한/글3.0 도스판 때부터였어요. 그 이후로 한/글은 제 컴퓨터 생활의 적어도 반 이상을 차지하는 프로그램이 되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다른 아해들이 컴퓨터를 비싼 게임기 취급할 때 저는 오로지 한/글로 학교 숙제도 하고 다니던 교회 주보도 만들고 신학교 다니는 친척 리포트 타이핑도 해주고 그러면서 지냈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한/글은 잘 해요. 도스 시절때부터 썼으니 매뉴얼 보면서 단축키 하나하나 다 외워서 썼고(지금 생각해보면 3.0판 매뉴얼이 꽤 잘 만든 책이었던 것 같아요), 무식하게 이거저거 해보다가 여러 번 컴퓨터 다운도 시켜가면서 프로그램 배우는 스킬을 익힌 덕분에 포토샵이나 엑셀 같은 다른 프로그램 쓸 때도 꽤 유용하게 먹히는 것 같고요. 아해 시절에는 워드 자격증이면 꽤 잘난 자격증 축에 속했던지라(...) 도전하기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2년 전 그냥 무작정 (공부 하나도 안 하고) 1급 시험 쳐보니까 필기고 실기고 한방에 붙더군요. 아, 이게 워낙 기본기가 잘 되어 있는지라... (자랑질 자랑질) 중학생 시절에 MS의 한컴 인수 파동을 거쳤고, 그 이후로 워디안과 2002, 2004, 2005 프로그램까지 베타테스터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열정만큼 끝까지 열심히 한 건 아니지만...

여튼... 어느 정도 고수 경지에 다다르게 되면 어떤 분들은 고어처리, 어떤 분들은 수식, 어떤 분들은 매크로나 공문서 작성 등등 각각 전문 분야를 파고들게 마련인데... 저는 편집디자인 쪽에 관심이 쏠렸어요. 역시 많은 분들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한/글 제품 패키지에 들어있는 각종 매뉴얼은 모두 한/글로 작성하고 인쇄한 것입니다. 매킨토시 필드에서 쓰이는 쿽익스프레스나 인디자인만큼 전자출판 쪽에 폭넓은 지원이 되는 건 아니지만 워드프로세서만으로도 그런 전문 프로그램 뺨치는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증명한 프로그램이 바로 한/글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한/글로 편집한 결과물을 그대로 출판한 책들이 과거에 다수 있었고, 지금도 컴퓨터 서적 코너를 보면 유독 한/글에서 편집디자인만 전문으로 다룬 책들이 많기도 하고요. 이런 식으로 한/글이 고수들의 프로그램이 되었다면 MS워드는 자기네들이 미리 만들어둔 템플릿으로 일일이 하나하나 떠먹여주는 쪽에 가까워요. 그게 한/글이 지금 많이 수세에 몰린 한 원인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만...

한/글의 수세... 여러 측면에서 검토할 수 있겠죠. 운영체제를 독점하고 있는 MS의 물량공세가 심하긴 합니다. 윈도를 자기네 회사에서 만들었으니 윈도 환경에 가장 어울리는 오피스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것도 MS 아니겠어요? 하지만 지금 최신 버전을 놓고 보면 디자인이나 아이디어적인 측면에서 MS워드가 더 깔끔하고 "예술적"이란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글이 여러모로 정체되어 있는 동안 MS워드는 혁신적인 무기들을 하나 둘 장착해왔고 그 때문에 저 스스로도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래도 한/글이 MS워드에게 꿀리지 않을 장점 하나는 여전히 지키고 있는데, 그건 우리말[한글]로 된 문서를 작업하기에 가장 최적인 워드프로세서라는 겁니다. 이건 좀 문화적/정서적인 문제라서, 그건 프로그램의 어떤 기능이나 특징을 분석해서 설명한다기보단 프로그램을 직접 체험해보고 그 아우라를 느껴봐야지만 알 수 있어요. 반면 MS워드는 예전부터 결국 영어권 문서에 최적화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해 왔고, 그 점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인 것 같아요.

두서없는 포스팅의 마무리. 그래서 저는 한컴과 한/글에 아직 많은 가능성을 기대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꿔 말하면 회사와 프로그램을 지켜야 할 이유라고도 할 수 있겠고. 앞서가는 IT 기업의 이미지를 다시 되찾았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아이리버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 같습니다만...) 그러려면 일단은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컴퓨터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축을 차지하는 워드프로세서이기에 더욱 그렇죠. 앞서 이미지로 링크한 베타테스터 모집 포스팅이 올라온지 1주일은 됩니다만 아직 거기 달린 덧글이 채 200개도 안 된답니다. (베타테스터로 선정되려면 포스팅에 꼭 덧글을 달아야 됩니다.) 처음엔 베타테스터 뽑히고 싶어서 시작한 포스팅이었지만 결국엔 부디 이 나름 싱싱하게 준비된 떡밥에 많은 분들이 낚여주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라고 읍소를 하게 되네요. 그래서 쓴 포스팅, 여기까집니다.


by lyh1999 | 2009/09/25 14:44 | 트랙백 | 덧글(5)
예수전


#1.

하느님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성서는 첫머리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창1:27) 물론 여기에서 '모습'은 눈, 코, 입 같은 외적인 생김새를 말하는 게 아니라 본성을 말하는 것이다. 즉 사람은 하느님의 본성을 담아 지어졌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선 우리에게 지나치게 익숙해진 서양식 신관神觀에서 벗어나야 한다. 동양 정신에서 특히 한국의 민간 사상과 종교에서 볼 수 없는 신관은 우리에게 '하느님은 어떤 존재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귀한 실마리를 준다. 하느님은 우리 삶과 세계의 외곽에서 우리를 절대적 힘으로 관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내 안에 '본디의 나'로 살아있는 하느님인 것이다. 우리 눈앞에 일어나는 수많은 불의와 학살과 기아와 참상을 자행하거나 외면하는 분이 아니라 불의와 학살과 기아와 참상 속에서 함께 고통받는 분인 것이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이런저런 종교적 형식에 기대어 나를 초월적인 상태로 끌어올리는 행위가 아니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지금 내 삶을 지배하는 온갖 부질없는 집착과 욕망들을 씻어내고 내 본디 모습으로, 하느님의 모습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돈이나 권력, 명예나 세속적인 성공 따위에 대한 사랑을 나에 대한 사랑으로 착각하는 삶을 끝내고 나 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이다. 하느님은 내 안에 존재하며 또한 모든 다른 내 안에 존재한다. 내 아내에게도 나 자식에게도 내 부하나 노예에게도, '내'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 모든 낯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은 존재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건 나를 사랑하는 일이자 동시에 모든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pp.202~203)

 



이어지는 내용
by lyh1999 | 2009/09/24 14:38 | From the Others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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